오래됨이 묻어있는 대학 도시, 하이델베르크
여행 전, 독일의 바이에른, 로맨틱가도의 동화 같은 사진들을 보았다. 오직 그 풍경에만 꽂혀 정한 여행지라 그밖의 많은 정보가 없었다. 가이드북에는 하이델베르크에 대한 설명이 있었는데, 기억나는 부분은 바로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 배경이었던 점이었다. 내가 아는 황태자의 첫사랑은 오래전에 봤던 드라마 뿐이다. 나름 영화에 대해, 그것도 로맨스 장르 영화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듣는 제목이었다. 가이드북에는 간략줄거리가 짧게 소개되어 있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다니게 된 황태자가 머물렀던 숙소에서 일하는 주인의 조카 여주인공과 사랑에 빠진다는 순정만화 같은 이야기.
2014. 09. 24
하지만 정작 하이델베르크는 그 풍경보다 우리에게 첫 동행자와의 여정으로 기억에 남았다. 기차에서 내려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두꺼운 독일 가이드북을 든 한국 여행자 한 분이 버스정류장에서 버스표를 뽑는 방법을 물었다. 우리 역시 좀 전에 다른 관광객에게 물어서 알았기 때문에 동질감에 방법을 알려드렸다. 같은 목적지, 같은 버스를 타고 가면서 결국 같이 여행하기로 했다. 그 분은 남편이 독일로 일하게 되어서, 여행을 할 겸 따라오셨다고 한다. 친화력이 굉장하신 분이었다. 우리는 하이델베르크를 거닐며,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에 빠져 딴 길로 새고, 케이블카를 반대로 타기도 했다. 정작 가이드북에 나온 곳의 반은 못 갔지만 다른 사람을 만났던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 분은 길을 모를 때마다 당차게 길을 물었었는데.
-이왕 묻는 거 잘생기고, 예쁜 사람한테 물어 봐. 이런 때 아니면 언제 대화해 보겠어. 그런 사람 보면 길 알아도 물어봐도 돼. 영어도 쓰고 얼마나 좋아?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 분의 말처럼 하이델베르크는 대학도시인 만큼 선남 선녀들이 많았고, 길을 물으면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날씨 때문이었을까. 구름 낀 우중충한 날씨는 이 도시를 '활기'보다는 '오래됨'으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촉촉하게 젖은 오래된 건물들은 그 색이 짙어져, 더 오래되어 보였다. 건물의 조각들은 볼수록 섬세했다.
그러나 여행을 가기 전에도, 가서도, 간 후에도 '하이델베르크'라는 여행지 자체를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이야기를 주제로 연재를 하는 만큼, 뒤늦게 <황태자의 첫사랑>을 보았다.
여행을 떠나기 전 영화를 보려 했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다운로드를 받을 수도, IPTV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여행을 다녀와서야 우리 집 옆 도서관에 DVD 자료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태까지 다뤘던 작품에 비해 별로 유명하지 않기 때문에 조금 자세히 소개해보려 한다.
워낙 오래된 작품이라 영화 내적인 재미보다는 외적인 재미가 흥미로웠다. 영화 포스터만 봐도 흥미롭다. 영화의 원제는 <The stdent prince>다. 남녀 주인공이 뮤지컬 드라마임을 알리듯 나란히 노래를 부르고 있다. 반면 한국판 영화의 제목은 <황태자의 첫사랑>이다.
여주인공의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실려있는, 만약 같은 내용으로 영화를 지금 만들었다면, 분명 잘생긴 남자 주인공이 커다랗게 차지하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이런 류의 영화의 관객 대부분은 여성들일테니. 당시 유명했던 마리오 란자의 히트송이라는 둥 배우와 홍보 문구 형식이 지금 영화 포스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점도 흥미로웠다.
느끼하게 꼬아 올린 곱슬머리는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가 생각나고, 황태자복을 입은 자태는 드라마 <궁>이 생각난다. 예상하는 그대로, 남자 주인공은 제멋대로이며,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황태자다. 감정 없이 뻣뻣함 때문에 사교를 배우러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다니게 된다.
'나는 이 곳 여관 주인의 조카이고, 당신은 황태자다.'라는 대사를 내뱉지만, 늘 남자 주인공 앞에서 당당한 여주인공은 드라마 <파리의 연인>의 여주인공과 겹쳐진다. 수십 편의 드라마, 영화 속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너무 옛날 러브스토리라 그런지 다소 이해되지 않는 전개가 많았다. 그래서 로맨스 보다 원작 제목처럼 황태자의 대학생활 이야기가 더 흥미로웠다. 영화 자체도 이 점에 더 초점을 맞추어 만들었다면 더욱 재밌을 것 같았다. 그러면 하이델베르크 대학 곳곳이 나올 수 있을테고, 그 곳을 여행하려는 사람이 더 많이 볼 수 있지 않았을까.
명문가 자제들과 실력 있는 학생들이 모였다는 하이델베르크의 생활은 영화 속만 보면 맥주 마시고, 노래 부르고, 맥주 마시고의 연속이다. 평민들로만 구성된 합창단에 신입단원으로 들어가게 된 남자 주인공. 환영주를 마시고 신이 났다. 여담이지만 주인공은 칼스버그의 황태자이고, 영화에서 맥주를 하도 신나게 마셔대니 괜히 칼스버그 맥주가 마시고 싶어 졌다.
신데렐라 스토리의 고전이라 해도 될 만큼 익숙한 전개에 조금 지루했지만, 결말은 나름 현실적이었다. '기승전'까지는 신데렐라의 클리셰를 따르지만 '결' 때문에 딱 신데렐라 스토리라고 말할 수는 없게 되었다.
<사운드 오브 뮤직>도 그렇고 <황태자의 첫사랑>도 그렇고 그 옛날에 뮤지컬 영화를 완성도 있게 만들었다는 점이 참 부럽다. 나름대로 영화, 드라마 강국인 한국에서도 잘 만들어진 뮤지컬 영화를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풍경을 기대했으나 영화가 만든지 오래되어서 그런지 하이델베르크 풍경을 잘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그래도 기억나는 영화 속 장면이 있다면, 오래된 하이델베르크의 기차역이다. 지금의 사진처럼 빨간색이지만 엉성하고 오래된 기차의 외형.
2년이 흐른 후, 남자 주인공은 하이델베르크로 가는 기차를 탄다. 그가 탄 기차는 호화롭지만 창문이라고는 없는 기차였다. 그러나 지금은 커다란 창문 밖으로 노을 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날의 여정이 창문 밖으로 저물어 간다.
글. Storytraveller
사진. 동생님, Storytravel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