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드라마 <눈길>
2015. 09. 05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끼익-
퉁.
입구를 여는 문은 무거웠다. 깜깜하고 좁은 인포메이션. 유일한 빛은 노란 빛 뿐. 오디오북과 입장권으로 이 달의 주인공인 '배봉기' 할머니의 일생이 담긴 카드를 받았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입구보다 더욱 무거운 또 하나의 문.
타닥타닥-
쿵.
군홧발 소리가 들리고, 철제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린다.
어그적 어그적-
바닥에 깔려있는 돌멩이들을 밟으며 좁은 길을 걷는다. 벽에는 소복을 입은 소녀들이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공간은 바로 '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어야 했던 전쟁과 고통의 역사를 담은 곳이다.
언제나 활기찬 홍대와 망원동 뒷골목에는 작은 박물관이 하나 있다. 예전에 들었던 건축 특강에서 가볼만한 곳이라는 추천을 받았었다. 2012년에 서울시에서 건축상도 받았다고 했다. 특강에서는 안에 있는 소장품보다 그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세계 여러 건축물들에 대한 소개를 들었었다. 해외에서는 이런 사례가 많은데 요즘 우리나라도 그런 추세로 흘러가는 것 같다. 어쨌든 그중 대표적인 건축물이 바로 이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이다.
돌멩이가 깔려있는 쇄석길을 지나면 받았던 카드 속 주인공 영상이 나온다. 많은 희생자가 있지만, 한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함으로써 더욱 와 닿게 만든 것이다. 카드의 내용을 옮겨 적으면 다음과 같다.
1914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배봉기는 "남쪽 섬에 가면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일본인의 취업사기에 걸려들어 1943년에 오키나와 도카시키 섬으로 끌려갔다. [빨간 기와로 된 위안소]에서 일본 군인들의 성노예로 몇 달을 지내던 중, 미군의 공습으로 위안소가 불타면서 산 속을 피난 다니다가 일본군의 취사반에 투입됐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군에 투항한 일본군과 함께 진지를 나와 미군의 민간인 수용소에 수용됐다. 수용소를 나온 후에는 성매매와 온갖 궂은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간신히 살았다. 1975년 지역신문에 사연이 보도되면서 세상에 알려진 후 1991년 77세에 오키나와에서 생을 마감했다.
영상이 반복되며 재생되고 있고, 한쪽 구석에는 몸을 구부려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방의 입구가 있다.
지하전시관에 꾸며진 작은 방은,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낮은 천장. 영상이 다 끝나기도 전에 나오고 싶을 정도로 답답한 공간이었다. 어둑하고 좁은 공간, 지하와 위층을 오가는 미로 같은 내부는 무서울 정도였다. 공포를 체험하는 체험관도 아니고, 그 공간에 그들의 삶을 옮겨 놓은 것뿐인데, 몸이 떨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둑한 공간이 마치 그들의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면, 전시실은 우리를 현실로 돌아오게 만든다. 전시관에는 그녀들의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힘겹게 싸워 온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들을 보면서, 떠오르는 드라마 한 편이 있었다. 전시관에서는 정리된 글을 읽는 순간 머릿속에서는 그 드라마로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다큐가 아닌 상업 영화나, 드라마로는 '위안부'를 다룬 소재는 최초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바로 올해 3.1절 특집으로 한 드라마 <눈길>이다.
드라마 <눈길>
이 글의 첫 이미지로 종분(김향기)과 영애(김새론)의 환한 미소를 선택한 이유는 끔찍한 일이 있기 전에는 모두가 가졌을 법한 평범하고 예뻤을 얼굴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픽션인 드라마니까 볼 수 있는 얼굴이다.
드라마 <비밀>과 다수의 단막극에서 만났던 유보라 작가의 작품의 장점은 인물의 심리와 내적인 갈등을 섬세하게 풀어낸다는 것이다. 보통 드라마는 영상으로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인물 간의 갈등이 주된 편인데, 이 작가의 드라마를 보고 나면 외부적 갈등보다는 인물들의 내면이 오히려 더 기억에 남는다. 그렇다고 너무 소설같거나, 긴장감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위안부를 소재로 한 <눈길>이라는 작품이 기대가 되었다.
드라마는 '현재-과거-현재'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의 '종분(김영옥)'은 살아남은 할머니들 중 한 명이다. 그 옆집에는 어른들의 무관심 속에 살아가는 철없는 고등학생 은수가 산다. 종분은 그런 은수의 모습을 보며, 과거를 떠올린다. 몇십년 전, 남부럽지 않던 부잣집 딸 영애(김새론)와 함께 끌려간 종분(김향기) 자신의 이야기.
영애는 겉으로 보기에는 강하고 심지가 굳어보이지만 그 안은 늘 위태롭다. 종분은 언뜻 보면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 같지만, 누구보다 영애 옆에서 위로가 되어 주는 속이 강한 친구다. 이 둘은 곧 깨질 것 같은 얼음 위를 걸으며 도망가고, 무릎까지 쌓인 차가운 눈길을 함께 헤쳐 나간다. 이 과정에서 줄거리로 정리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마주한다.
드라마는 이들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보다는 이들이 있는 공간을 통해 그 고통의 순간을 유추하게끔 한다. 연출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번해 전주 국제 영화제에서 2부작이 묶여 한 편의 영화로 상영되었었다. 좋은 작품이지만, 두 번은 보지 못할 아픈 내용을 담았기 때문에 영화제에서 보지는 못했지만, 영화관에서 보면 훨씬 와 닿을 장면들이 떠올라 아쉬웠다.
전시를 둘러보고 나면, 소박한 정원 안쪽에 베트남 전쟁에서 우리와 똑같은 피해를 겪었던 여성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곳이 있다.
“나도 일본군인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겪었는데, 베트남 여성들도 우리 한국군인들에게 나와 똑같은 아픔을 겪었다고 들었습니다. 한국 사람으로서 너무나 죄송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뭔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은 힘껏 하겠습니다.”
타인의 아픔이 조롱거리가 되고, ‘공감’이 ‘능력’이 되어버린 안타까운 사회입니다. 상처 입은 사람은 약하지만 그들이 서로를 보듬고 연대하는 모습을 통해 이 척박한 현실에도 희망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드라마 <눈길>의 기획의도 중
마지막 장소는 할머니들의 이름이 적힌 벽돌에 꽃을 꽂으며 추모하는 테라스로 연결된다. 일부러 가장 볕이 밝은 곳에 위치시켰다는 이 곳. 검은 벽돌 사이사이로 햇빛이 들어와 반짝거린다.
글. Storytraveller
사진. Storytravel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