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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aneur Aug 24. 2023

뉴욕의 노숙자가 꿈입니다.

 때는 바야흐로 고교생 시절. 누가 봐도 사춘기였던 시절이었다.

 이성에 눈을 뜨고 부모님께는 반항하며 내 삶의 주체를 찾아가는 시점. 나는 미국에서 마음 편히 터놓을 친구가 없었고 아직은 철이 없고 꿈이 없던 시절이었다. 거기에 한국에 있는 친한 친구들은 나 없이 자기들끼리 고등학생이 되어 시시덕거리며 잘 지내고 있으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지금이나 그 시절이나 소위 SNS 같은 게 좀 문제가 되는 면이 있었는데 나도 당시 친구들의 싸이월드를 보면서 무언가 나 말고 다른 친구와 잘 지내니 질투도 나고 내가 만약 미국에서 계속 있으면 왠지 모르게 어느 순간 멀어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걱정이 많았었던 어린 시절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긋나기도 하고 심통도 부리고 결과적으로 이게 모든 이유는 아니었지만 나는 한국에 돌아오는 것을 선택하게 되는 마지막 흐름이었다.

 

 그래도 미국에서 보낸 시간은 내게 지금도 소중한 순간으로 남아있고 그중에서는 자주는 아니더라도 한 번씩 가게 된 여행이 영향이 꽤 있었다. 지금부터는 그 여행기 중 하나 바로 'NEWYORK'에 관한 것이다.

 



 아무래도 미국에서 약 반년 간 거주하다 보니 조부모님께서 한 번은 놀러 오셨었다. 지금은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이제는 연세가 차셔서 요양원에 계신 할머니시지만 당시엔 두 분 다 그럭저럭 정정하셔서 잘 걸어 다니셨고 그렇게 조부모님과 함께 우리 가족은 뉴욕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이 풍경을 비슷하게 직접 보았다는 게 신기하다.


 사실 이 뉴욕 여행은 내 기억에서 꽤 많은 부분이 공백으로 남아있다. 뭐랄까 임팩트가 없었을까? 아니면 이미 삔또 나간 내 기분 탓일까. 어찌 되었든 내게는 이 뉴욕 여행에 많은 기억이 남아 있지가 않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보다 뉴욕을 동경하는 친미성향으로써 그 시절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게 너무나 아쉬울 따름이다.


 기억나는 건 확실히 바쁜 도시였다는 점 그리고 사람이 무지막지하게 많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당연히 뉴욕의 명소 대부분 우리를 데려가셨는데 크라이슬러 빌딩이라던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자유의 여신상 등 많은 것을 보았었다. 놀랍게도 당시 찍은 사진을 모두 보유하고 있는 건 아니나 우리가 익히 영화에서나 사진으로도 자주 보는 그 뉴욕의 그림은 본 기억이 없다...


  

뉴욕의 명소와 콜럼비아 대학


 그냥 미국이었다는 게 그 당시의 평가. 신기한 거는 확실히 우리가 거주하던 버지니아주에 비해서 관광객이 많았고 가장 미국 스럽다는 느낌이었다.

 당시에 나는 아시아인 그리고 한국인의 특성상 '갈릭'냄새가 나는 것에 민감했고 늘 학교를 가거나 외출할 시에는 음식도 신경을 썼고 샤워도 원래는 매일 안 하다가 냄새 때문에 미국에서부터 매일 샤워를 하기 시작했는데 따로 내게 갈릭 냄새가 난다고 표현을 했던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엠파이어 스테이트였나 여하튼 어떤 빌딩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엘리베이터에서 한 무리의 외국인들과 같이 탑승을 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그들이 어쩌고 수군거리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기분이 나쁠만한 상황이었지만 뭐 어리기도 하고 그다지 엄청 기분이 나쁘진 않았으나 충격적인 건 오히려 그들에게서 소위 '암내'가 너무 진동을 해서 숨은 오히려 내가 쉬지 못하고 참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길을 가다가 진짜 미국의 노숙자를 보기도 했다. 뭐랄까 처량한 느낌? 그리고 이걸 보고 난 뒤에 어메이징 사고가 터져버리고 말았다.




 뉴욕 하면 무엇이 있던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들이 즐비한 곳이 아니던가 바로 아이비리그. 너무나도 당연하게 한국의 학부모였던 우리 부모님은 당연히 아이비리그 대학에도 우리를 데려갔었다.

 

 하버드, 콜럼비아, 예일 그리고 프린스턴 이렇게 4곳의 대학을 구경했고 당연히 내가 이곳에 입학하기를 바라고 계셨었다. 그래서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벤을 타고 다녔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사고는 거기서 터졌다.

 처음에는 콜럼비아, 하버드 순으로 구경을 했는데 당연히 거기 있는 젊은 학생들이야 재학생이지 않겠는가? 아버지는 길가는 학생들에게 가끔 말을 걸며 즐거워하셨는데 나는 왜 저러시나 싶긴 했었다.

Yale Univ 졸업

 그러다가 예일대에 방문했을 때였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딱 그날 예일대의 졸업식이 있는 날이었다. 당연히 많은 학생들이 학사모를 쓰고 졸업을 만끽하고 있었는데 이건 내게는 불행이었고 그에게는 좋은 일이었지만 한국인 학생 한 명이 졸업을 했고 그의 부모님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는 부모님의 레이더에 들어왔고 부모님은 그걸 부러워하셨는데 갑자기 내게도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갑자기 벤 안에서 앞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어디 가겠냐는 질문에 나는 반항심과 항쟁심에 너무나도 당당하게 '배재대학교'라고 말해버렸고 내 장래 희망은 노숙자라고 말했었다. 미친놈


 어디까지나 배재대를 무시하려는 의도는 없다. 다만 당시에는 내가 중학교를 계룡대에서 다녔었고 라디오 같은 곳에서 늘 배재대를 비롯해 BMW(배재, 목원, 우송)라고 불렸던 대학교들이 있었고 가장 익숙하게 접했던 게 배재대였을 뿐이다. 물론 솔직한 이야기로 배재대가 공부를 잘하는 대학교는 아니었다 보니 이미지상 공부를 못하는 학교라는 인식이 있었고 당연히 어느 정도 공부를 하던 내게는 맞지 않는 그림이라고 생각은 한다.


 그러니 부모님이 화가 안나 셨겠는가 아들놈이 그것도 장남에 공부도 좀 하던 녀석이 갑자기 목표 대학은 배재대이며 장래희망은 노숙자라고 하고 있으니 속이 얼마나 상하셨겠는가 하하. 그러나 나는 끝까지 고집을 피워서 농담이 아니라고 했고 아까 노숙자를 보니 차라리 그렇게 사는 게 마음이 편하겠다고 말했다.

 

 내 말을 들은 엄마가 대판 노하셔서 내게 쏘아대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뭔가 중재하려 했지만 엇나가는 나 때문에 화가 나셨고 그저 옆에서 지켜보시던 조부모님이 말리느라 고생하셨을 뿐이었다.


 나는 그래도 고집을 꺾지 않았고 결국 그날의 여행은 그렇게 초 쳐버리고 숙소로 돌아와 그냥 말없이 시간을 보내기만 했었다.




 지금이야 철없던 시절의 철없는 녀석의 이야기이지만 아마 그때 부모님이 느끼신 실망감은 얼마나 클지는 짐작이 되지도 않는다. 지금도 종종 나를 놀리실 때  그 노숙자 썰을 풀고는 하시는 거 보니 임팩트가 있었던 듯싶다.

 사실 그러다 보니 나도 뉴욕 여행이 대체적으로 기억은 안나는 것 같다. 당시에 이 문제로 너무 크게 싸웠었고 그러다 보니 이게 가장 기억에 남은 게 뉴욕 여행이었다.


 어린 시절의 실수와 치기 어린 고집이 문제였던 시기. 그래도 그럭저럭 기억에 남는 것들이 있었던 여행지였다. 확실히 나름 세계 최대의 도시 중 하나인 뉴욕이었고 사람도 많고 볼 것도 많았던 도시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본 것처럼 커피에 도넛 하나 먹어보진 못했지만(당시엔 커피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무언가 미국을 즐겼다는 느낌이 남아있다. 아차 하버드에서 시저샐러드를 먹었었는데 그게 은근히 맛있었다. 이게 하버드의 맛...?


 아마 이제는 더 이상 아이비리그 대학에 관광이 아닌 목적으로 갈 일도 없고 당시에도 솔직히 성적으로도 갈 수 없었던 아이비리그 대학. 그래도 한때는 꿈꾸던 시절도 있었던 만큼 무언가 닿지 못하는 꿈에 있는 대학들을 직접 내 두 눈으로 볼 수 있던 경험은 좋았다.


 그래서 아직도 언젠가 뉴욕만큼은 제대로 한 번 가서 즐기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는 만큼 지금도 뉴요커처럼 노트북을 켜두고 커피 한 잔을 들이켜고 있다. 언젠가 돈 많은 뉴욕의 노숙자가 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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