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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aneur Sep 01. 2023

미국에선 챔스 중계를 오후 3시에 하더라

 한창 축구에 빠져들기 시작한 시점에 축구 경기를 시청하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크리티컬 한 문제였다. 아직 어렸을 때라 해외와 국내 인터넷 사정을 잘 모르던 시기다 보니 왜 해외 ip로는 국내 중계를 볼 수 없는지 매우 의아했었다. 당장 한국 축구 경기는 당시엔 네이버를 통해서 시청이 가능했는데 해외에선 볼 수 없다 하고 똑같은 프리미어리그 중계도 네이버 혹은 아프리카tv에선가 시청이 가능했었는데 이마저도 볼 수가 없었다.


 물론 미국이니 MLS 중계가 있긴 했지만 이는 애시당초 비인기 스포츠였던 만큼 중계를 잘해주지 않았고 내가 응원하는 팀이 없다 보니 보아도 재미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축구 경기를 라이브로 시청하지 못한 지 몇 달이 되어가던 찰나 아마 5월 즈음일 텐데 그때가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을 비롯해 마지막 경기가 진행되는 시기였다.

 학교에서 돌아와 평범한 오후 그냥 tv에서 뭐 볼 게없나 하고 틀었는데 때마침 한창 경기가 진행 중이었다. 나는 당연히 아는 이름의 팀들이 시합을 하고 있어 생각 없이 지켜보았고 오랜만에 시청한 축구 경기는 정말 재밌었다.


 대략 오후 3시 정도에 경기가 시작되었는데 이 때는 아무래도 다른 미국 스포츠는 경기를 진행할 때가 아닌지라(보통은 저녁에 중계가 있다) 워낙 사이즈가 큰 대회이기도 하고 미국이라 해서 축구를 다 싫어하는 게 아닌 꽤 많은 남미의 이민자라던가가 있어서 중계를 해줬던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당시의 난 리버풀팬이 아닌 그저 한 명의 축구 팬이었기 때문에 이제 막 맨유에 입단한 박지성 선수를 응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한 패배, 당시 AC밀란과 맨유가 4강에서 격돌했는데 나는 가장 좋아하던 선수가 요즘은 쉐우첸코가 불리는 Shevchenko 선수가 최애였다. AC밀란에서 갓 첼시로 이적한 해였는데 그래서 나는 AC밀란을 미워했다. 뭐 어린 마음에 왜 팔았지? 그런 느낌으로다가 팔았으니 밉다 뭐 이런 식의 마인드였다.


  

쉐바골


 그래서 맨유를 응원했지만 패배했고 또 다른 준결승 매치는 리버풀과 첼시의 경기였다. 당시 쉐브첸코(나는 이 발음이 편하다)가 첼시로 이적했기에 첼시를 응원하고 있었는데 첼시의 홈구장 스탬포드브릿지에서 한 경기는 라이브로 보지 못했고 안필드에서 벌어진 2차전만 라이브로 시청할 수 있었다. 


 그 경기에 대한 소감은 간단하게 


 '와 리버풀 정말 열심히다'


 라는 평가가 맞을 듯하다. 제라드의 어시스트에 이은 아게르의 득점포로 1대 0 신승을 거두어 연장전 그리고 승부차기를 거쳐 리버풀이 결승에 진출했고 결승전은 대망의 리버풀 vs AC밀란의 매치가 성사되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챔피언스리그는 원래 경기는 주로 평일 저녁 시간대에 진행되는데 그래도 결승전은 주말에 진행된다. 문제는 당시 내가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시간에 학원에 가야 한다는 것. 

 

 놀랍게도 당시 미국에서도 다니던 학원이 있었는데 그 수업 시간이 챔스 결승 시간과 겹쳐버린 것이었다. 나는 정말 경기가 보고 싶었고 학원을 안 가면 엄마의 눈치가 보였기 때문에 많은 고민이 있었는데 그래도 용기 내어 여쭤보니 생각보다 쿨하게 수락해 주셨다. 


 그렇게 경기 당일. 지금이라면야 맥주와 안주를 구비했겠지만 당시엔 미성년자인 만큼 먹을 과자 한 봉지 챙겨 설레는 마음으로 티비 앞에 앉았다. 


 경기는 시작되었고 나는 당연히 AC밀란이 미웠고 그전 준결승에서 열심히 뛴 리버풀에 호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리버풀을 응원하게 되었다. 


 

우승은 AC밀란


 스코어 1:2로 AC밀란의 승리. 경기 자체는 재밌게 시청했었다. 지금이라면야 아마 졌으니 흥분해서 난리도 난리가 아니었을 텐데 당시엔 그저 지금 이 시간에 학원을 안 가고 축구를 본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쁜 마음이었다. 심지어 경기마저 재밌었으니 내가 후회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후 꾸준히 리버풀을 팔로우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내가 현재 리버풀 팬이 되게 만든 계기가 바로 이 날이 아니었나 싶다.


 



 무언가 재미나게 써보려 했지만 막상 또 축구 이야기이다 보니 생략된 것도 많고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았던 거 같다. 그저 당시에는 축구에 미쳐있어서 축구 경기를 시청한다는 거 자체가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아 지금 한 번 끄적여보았다. 


 이후엔 데이비드 베컴이 MLS에 진출해 첫 축구 경기 직관을 가보기도 했는데 이 날의 즐거움이 있어 당시에도 직접 시청할 의지가 있던 게 아닌가 싶다. 


 들은 바 요즘은 이때와 달리 어느 정도 축구도 인기가 생겼다고는 한다. 다만 미국에서만큼은 확실히 힘을 못쓰는 느낌이 있는데 그래도 이 시절보단 관중수도 늘었고 인기도 더 좋아졌다고 한다. 뭐 내가 MLS를 보러 갈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잘되고 있다니 기분이 뿌듯하다 왠지 나도 한몫 거들지 않았나 싶어서 하하




 이후에는 한국에서만 챔피언스리그를 시청했다. 유럽 여행 당시에도 A매치 기간이라 리그 경기를 볼 수도 없었고 직관도 불가능했다. 언제나 챔스 경기를 보려면 평일 새벽 4~5시에 일어나야 하고 그나마 결승전 정도만 주말에 볼 수 있기 때문에 쉬운 시청 시간대는 아니었다. 물론 회사를 다니던 시절이었다면 오후 3시도 힘들었겠지만 말이다. 

 

 그 시절 오랜만에 축구 경기를 라이브로 본 기분은 정말 즐거웠고 덩달아 학원도 빠져가며 보게 해 주신 부모님 덕분에 정말 좋은 추억이 남게 되었다. 아마 누군가와 함께 시청했다면 더 즐거웠을 것 같은데 아쉽게도 그러지는 못했다. 


 아마 살면서 두 번 다시 오후 시간대에 챔스 결승을 볼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나는 내 친구들과 달리 한 번은 해봤다는 데에 의의를 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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