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정지 버튼을 인생에서 언제 누를 것이냐가 중요하다.
월요일 아침에는 주간회의가 있다. 회사 공지사항 및 업무를 공유하고, 각자 자리에 앉아 한 주의 업무를 시작했다. 월요일에는 중요한 업무가 아닌 이상, 야근을 하지 않았다. 다른 나라에서 월요일 아침을 맞이하는 고객들 역시,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느라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화요일부터 야근이 시작된다. 다른 나라에서 눈을 뜨는 고객들을 위한 맞춤 서비스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시간을 맞추고, 조건을 맞췄다. 낮에는 한국에 있고, 밤에는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 새 지쳐 침대에 눕는다. 다시 출근을 하고, 다시 야근을 했다.
몸이 지쳐서 일이 재미 없어진 것인지, 일이 재미없어서 몸이 지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순간부터 일이 재미 없어졌다. 일이 재미없다고 이야기하면, 누가 일을 재미로 하냐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이 일이 나에게 맞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 이야기하면, 모르겠으면 그냥 더 해보라는 대답을 듣곤 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싶다고 이야기하면, 하고 싶은 일은 취미로 하라는 답변을 들었다.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이야기하면, 조금 더 참고 버텨 보라는 말을 들었다. 더 이상 제 역할이 없는 것 같아 그만두겠다고 이야기하였을 때는, 나에 대한 평가는 내 몫이 아니라 회사에서 해야 하는 것이라는 답을 들었다. 내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정해져 있는 답변들은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 내가 밖을 향해 질문을 던지면, 밖에서는 그 질문을 다시 집어넣으라고 이야기했다. 나의 마음이 굶주려서 나온 질문이었으나, 그들에게는 배부른 소리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 버린 질문은, 이번엔 나에게 묻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질문을 던지더라도, 나는 일관되게 모르겠다는 답변만 할 뿐이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까지 힘들고 고민되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나는 얻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기준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과 스스로의 답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괴로웠지만 괴로움의 근원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다. 질문은 계속되었으나 밖에서는 정해져 있는 답을, 안에서는 불분명한 웅얼거림만 있을 뿐이었다.
나의 고민과 상관없이 일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나는 분명 삐그덕 거리는 의자에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앉아도 의자에 제대로 앉을 수가 없었다. 불편했다. 내가 앉아있는 이 곳이 불편했다. 어느 날, 5년 후에도, 10년 후에도 자신의 일을 계속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 보라는 이야기가 유행가처럼 퍼졌다. 머릿속에 맴도는 그 질문은, 나의 미래를 고민되게 만들었다. 하루하루는 어떻게든 버티겠지만, 나의 미래가 오늘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고개를 절로 젓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회사를 나갈 수 있는 형편이 되지는 못했다. 나는 뇌에 차가운 물을 들이붓고, 머리를 맑게 만들었다. 의자가 불편하다고 해서, 서서 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불편해도 의자는 의자다.
여러 생각들이 오고 갔고, 나는 그것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의자를 고칠 것인가, 새로 살 것인가. 의자를 고친다면 어떻게 고칠 것인가. 혼자서 고칠 것인가 다른 사람과 같이 고칠 것인가. 의자는 나 혼자서 고칠 수 있는 것인가. 의자를 고칠 수 있는 의지가 나에게 있는가. 의자를 새로 산다면 언제 새로 살 것인가. 의자를 새로 살 돈은 있는 가. 다른 준비는 무엇이 필요하며, 나는 새로운 의자에 앉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처음엔 의자를 고치기 위한 시간을 보냈다. 불편한 의자에 앉아있기는 하지만, 회사에서 제공한 의자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일을 재밌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어느 정도 성과를 보였다. 문제는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었으며, 강한 지구력이 요구되었다. 아무리 달려도 결승선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마라톤 같은 시간이었다. 불현듯, 행복에 대한 기준이 없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렇게 행복하지 않다고 느낀다면 그것만으로도 문제가 있는 거 아니야?라는 의문이 들었다. 주변 사람들의 수많은 질문에 대답할 멋진 대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느끼는 것만으로도 나의 삶의 방향을 틀어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새로운 의자를 사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어떤 의자를 사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과 어떻게 하면 나에게 편한 의자를 살 수 있는지 생각했다. 의자가 준비되면, 불편했던 의자에서 일어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면 충분한 준비를 한 후에 나와야 한다는 사람들의 조언에 나는 구색이라도 맞추려고 애썼으나, 그냥 애만 쓸 뿐이었다. 나는 버릇처럼 준비되면 내 사업을 시작할 거야, 라는 말을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말만 하였다. 새로운 의자를 찾기 위한 의지는 아주 쉽게 무너지곤 했다. 업무에 밀리고, 피곤함에 밀리고, 그리고 익숙함에 밀렸다.
말버릇처럼 준비만 되면 회사를 나올 생각이야, 라는 나의 말에 이직을 권유하던 친구는 언제까지 준비만 할 거냐며 다그쳤다. 회사 안에서 생각을 하려고만 하지 말고, 차라리 회사를 나와서 생각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회사를 나와서 생각해보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불안한 시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나는 내가 앉고 있는 의자를 버릴 수가 없었다. 행복하지 않았지만, 다음 행복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더 큰 불행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만으로도 리스크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새로운 의자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바닥에 앉을 자신이 없었다. 한 살이라도 더 어렸을 때는, 언제든지 의자를 박차고 나올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더 우세했고, 그렇게 행동한 적이 많았다. 하지만, 한 살이라도 더 먹은 후에는 의자를 박찰 자신도 없어졌고, 준비된 새 의자가 있는 게 아닌 이상 일어날 용기도 가지지 못했다. 나는 겁이 많아진 어른으로 성장했고, 밥벌이를 하는 어른이라면 버틸 줄도 알아야 하는 거라며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나는 의자에서 조금이라도 더 앉아있기 위해 자세를 요리조리 바꿔가며 버텼다. 오늘은 어제와 같았고, 내일도 오늘과 같을 거라는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제와 같지 않은 오늘을 맞이하게 되었다. 회사는, 나에게 더 낮은 의자로 바꿔 앉으라는 경고장을 보내왔다. 회사는 나의 앉아있는 태도에 대해서 문제 삼았고, 나는 새로 앉게 될 의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비로소 내 것이 아닌데 너무 오래 그 의자에 앉아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더욱이 내가 납득될만한 이유도 아닌 것으로 이렇게 쉽게 의자를 뺏겨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될 것을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고민되었던 지난날들이 머릿속을 스쳐갔지만, 붙잡지 않았다. 그리고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한 순간이었다.
나는 여기 있는 어떤 의자에도 앉지 않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동료들은 내게 여태까지 불편했어도 잘 앉아있었는데, 한 번 더 버티고 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 역시 자신들이 앉아있는 의자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오래 버틴다는 건, 누군가에게는 위대한 일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미련한 짓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표는 내게 지금 가지고 있는 부족한 점을 고친다면,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의자를 바꾸라고 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대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비로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의자는 불편해도 어떻게든 앉을 수 있다고 말이다. 의자가 아니었다. 의자를 내게 건넨 사람, 그리고 다른 의자와 함께 앉아있던 이 공간, 의자에 앉아서 더 이상 꿈꿀 수 없는 나의 불안한 미래,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의자에 집중하느라, 내가 했던 본질적인 질문들을 나는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놈의 의자,라고 생각했다. 그놈의 의자는 누군가에게는 권력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붙잡아야 하는 마지막 동아줄 같은 것이었다. 의자가 주는 편안함에 길들여져, 다른 새로운 의자를 찾을 줄만 알았지 내가 걸을 수 있단 사실을 잊고 있었다. 나는 그놈의 의자에 다시 앉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 다른 일은 없는지, 나에게 맞는 일인지, 내 선택이 옳은 지 등등의 수많은 질문들을 자신에게 던지게 된다. 하지만,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하지 못하는 순간 우리는 갈등하게 된다. 나의 선택이 잘못됐다는 사실에 대해서 수긍하기 힘들어지고, 이런 현실을 살아가는 나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게 된다. 나의 경우, 고민은 끝도 없었고 답도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 이건 아니야, 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오래전 나는 걸을 수도 있었고, 뛰어다닐 수도 있었는데, 나는 왜 계속 앉으려고만 했을까 라는 물음이 나를 스쳤고, 나는 내가 오래도록 앉고 있던 의자에서 일어섰다.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불안했지만, 불편하지는 않았다. 의자에 어떻게 앉지가 아니라, 어떻게 걷는지 어떻게 뛰는지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다. 그리고 내 의자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 지도 생각해본다. 누군가의 힘에 의해서 조종되는 의자가 아니라, 걷다가 쉬어갈 수 있는 벤치를 생각해본다. 의자에 내 몸을 맞출 것인지, 몸에 맞춰서 의자를 만들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해본다.
나는 퇴사를 권하고 싶지는 않다. 타인의 먹고사는 문제를 내가 이래라 저래라 감히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퇴사의 이상적인 모습을 만들어내고 싶지도 쓰고 싶지도 않다. 퇴사를 했다고 하여, 한순간에 잘 살게 되는 것도 아니고, 삶이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하던 일을 놓았을 뿐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새로운 일을 다시 시작해볼 수도 있는 기회를 얻을 수도 있지만, 생각보다 많은 기회를 놓치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고로, 퇴사한 사람을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한편으로는 무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나 못하는 것 같지만, 사실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퇴사 경험을 안 할 수가 없다. 단지, 지금 내가 못하는 것일 뿐, 언젠가 내 차례가 돌아온다. 내 손으로 결정되느냐, 남의 손에 의해서 결정되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원대한 꿈을 품고 회사를 나오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나처럼 한순간의 결정으로 회사를 나오기도 한다. 다양한 사람이 있는 만큼, 다양한 퇴사도 존재한다.
다만, 일시정지 버튼을 인생에서 언제 누를 것이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들을 개인의 행복이라는 기준에 따라서 가지치기하듯 다 잘라버릴 수는 없겠지만, 참고 견디고 있음에도 나의 미래가 불안하고, 나의 현재가 만족스럽지 않다면, 게다가 더 이상 견딜 힘도 없다면, 그렇다면 본인 스스로 진지하게 일시정지 버튼을 누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계속 소리를 내며 재생되는 순간만이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잠시 멈춘 상태로의 고요함도 분명 의미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