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소설이 시작되다

나의 소설 vs 너의 소설

by 시오



나의 소설 vs 너의 소설

Part 2. 새로운 소설이 시작되다


현성에게 들어온 번역 의뢰는 미국 작가 '조쉬'의 다섯 번째 소설 <아무도 없다>였다. 조쉬의 책들은 그간 꾸준히 한국에 번역되어 소개되었고 모두 현성이 맡아서 진행했다. 소설을 더 이상 읽지 않는 한국 독자들에게도 조쉬는 어느 정도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작가였다. 마지막 번역 후 일 년 만에 그의 새로운 소설을 번역하게 된 현성은 출판사 대표의 신뢰를 받고 있었다. 꾸준히 그 출판사에서 번역하는 번역서들을 도맡아 작업했으며, 마감 기한을 어긴 적도 없었다. 때로는 현성이 출판사 대표에게 미국에서는 알려졌으나, 한국에서는 아직 유명하지 않은 작가들의 소설을 번역해보자고 의뢰를 하기도 했다.


"이번에 조쉬의 새로운 소설이 나왔다고 해서 보지도 않고 에이전시 통해서 계약했어. 소설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해서 넘겨줬는데, 그건 메일로 보내줄게. 나도 읽어봐야 하는데, 계약했던 다른 번역가랑 문제가 생겨서 말이야. 내가 요즘 정신이 없어."

"네, 대표님. 원고 보내주시면 바로 번역하도록 할게요. 그런데 언제까지 번역을 완료하면 될까요?"

"급하지는 않고... 지금 진행 중인 것도 있으니까 9월까지 마무리해줄 수 있나?"

"네, 알겠습니다. 따로 요약해서 넘겨드릴게요. 나중에 그걸로 읽어보세요."

"역시 김프로야. 내가 항상 믿는 거 알지? 그럼 부탁할게"


출판사 대표는 현성을 김프로라고 불렀다. 현성은 원고를 모두 출력해서 뽑았다. 요약본도 같이 받았다. 조쉬의 새로운 소설 <아무도 없다>는 휴가를 맞아 아시아로 여행을 떠나는 폴에게 벌어지는 일을 담은 미스터리 여행기였다. 조쉬는 긴 호흡의 글을 쓰기보다는 늘 짧은 호흡으로 문장을 끊어 쓴다. 이번에도 문장으로 묘사하기보다는 인물들의 대화가 주를 이뤘다. 미스터리 여행기였지만, 피식 웃게 만드는 부분들도 있었고 아시아가 처음인 폴에게 생기는 황당한 에피소드로 지루할 틈 없이 소설이 이어졌다. 폴의 여행기에는 말론과 조쉬라는 인물도 등장하는데, 말론은 하도 찌질해서 폴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조수아는 폴을 사랑하는 연인으로 나오는데, 말론을 경멸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현성은 작업 중이던 번역을 잠시 미뤄두고, 조쉬의 새로운 소설의 첫 번째 문장부터 번역하기 시작했다.


현성도 어릴 적에는 소설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 별다른 재주가 없었고, 그나마 자신이 가장 선택하기 쉬운 직업이 번역가였다. 오래된 꿈을 버릴 수는 없었지만, 오래된 꿈을 이룰 방법도 없었다. 물론, 번역 일이 싫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외국 작가들의 글을 번역하는 일은 그를 흥분시키기도 했다. 때로는 자신이 번역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한국 독자들에게 다른 의미로 전달될 수 있음에 책임감을 느끼기도 했고, 묘한 긴장감을 느끼기도 했다. 어려운 단어를 쓰거나, 아무래도 한국어로 번역하기 어려운 문장들이 생길 때면 직접 작가들과 연락을 주고받기도 했다. 하지만, 조쉬의 경우 워낙 쉬운 단어들로만 글을 썼기 때문에 조쉬의 모든 소설을 번역했음에도 한 번도 그와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조쉬는 그동안 한 번도 한국에 온 적도 없었기에 둘은 글로써 만날 뿐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조쉬는 현성에게 관심이 없었다. 어떤 일이든 에이전시에서 알아서 처리했고, 조쉬가 직접 자신의 작품을 두고 누군가와 대면한 적은 없었다. 출판사에서 몇 번이나 한국에 초대한 적이 있었지만, 조쉬에게는 한국도 그리 매력적인 곳이 아니었다.


현성은 생각보다 빠르게 <아무도 없다>를 번역하기 시작했다. 9월이 되기도 전에 번역을 끝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의 속도라면 다른 일을 추가로 더 받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현성에게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소설 속에 등장하는 '말론'이었다. 말론의 직업 역시 번역가로 나온다. 하지만 하도 찌질해서 제대로 일을 따내지도 못할뿐더러, 기껏 따낸 일도 제대로 끝마친 적이 없었다. 그런 그를 항상 챙기는 역할이 바로 폴이었다. 현성은 말론이 신경 쓰였다. 아니, 조금은 화가 났다. 같은 번역가로서 느끼는 감정이었을까? 아니면 그런 상황 자체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마치 자신 같아서였을까? 실제 현성은 말론의 성격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현성은 폴에 더 가깝다. 늘 완벽하게 일을 끝내려했고, 그런 성격 때문에 현성과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그를 신뢰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는 폴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 현성이었다. 폴은 태어날 때부터 사랑받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현성은 아니었다. 그는 늘 애쓰고 있었다. 그에 비해 보잘것없는 말론에게 마음이 쓰였다. 노력조차 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 인물이지만, (아니 사실은 그렇게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도 않아 눈에 띄지도 않는 인물이지만) 이상하게 현성은 말론을 보며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이건 소설이다. 소설 속 인물에게 열등감을 느낄 필요도 느끼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성은 생각했다. 소설이니까. 소설이니까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현실에서도 바꾸지 못하는 것들을, 소설이라면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현성은 순간 신이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만약 등장인물에게 다른 설정을 해준다면, 이 소설은 어떻게 될까? 물론, 이 소설은 현성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생각했다. 만약... 그러니까... 아무도 내가 새로운 소설을 만들었다는 걸 알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아무도 모르게 소설을 출판할 수도 있지 않을까? 현성은 생각했다. 내가 바꾸더라도, 이건 소설이다. 그냥 소설일 뿐이다. 현성은 지금까지 번역했던 문장들을 지웠다. 그리고 마치 오랫동안 준비했다는 듯이 말론을 주인공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사람. 현성이 새로 부여한 말론의 설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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