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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사이다 Mar 28. 2024

[실천] 철학을 넘어 성찰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흔적을 세상에 남기고 싶어 한다. 누군가는 자식을 낳음으로써 자신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것을 알리려고 한다. 누군가는 작품, 또 누군가는 단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이어나가려고 한다. 우리가 이야기했던 자신만의 철학이라는 것이 세상에 우리라는 존재의 흔적을 남기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만의 인생을 살았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던 나머지, 자신을 설명하는 이론을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자신만의 철학이 그런 존재가 되길 원치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은 자신만의 철학을 통해 내가 바뀌고 내 인생이 변화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원하는 것이 나와 같은 것이라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성찰이며, 모든 위대한 삶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성찰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철학이 무엇이냐는 질문과 닮아있다. 질문하기는 쉽지만 답하기는 어렵다는 것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성찰을 이야기하는 것 밖에 없다. 나에게 성찰은 자기 자신에 대해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철학은 과학과 마찬가지로 누구에게나 진실인 것을 찾으려고 한다. 성찰은, 그와 다르게 자신에게 진실인 것을 찾고자 한다. 세상에 단 한 명인 자기 자신에게 진실인 것을 말이다.


진실인 것을 알아내는 것이 쉽겠는가.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과거에 사로잡혀 후회만 할 수 있으며,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기호만 파악하는데 그칠 수 있다. 나에게 진실인 것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여러 덕목이 필요하다.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첫 번째로는 솔직함이 필요하다. 진실의 반대는 거짓인 것처럼, 자기 자신을 속이면서 진실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또한 진실을 마주하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진실이란, 내가 듣고 보기에 좋은 내용만을 말하지 않는다. 때로는 마음이 불편할 수 있고 내 안의 있는 여러 문제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진실을 진실로서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의지가 필요하다. 성찰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해야 하며, 행동으로 옮겨져야 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의지이다.


성찰을 통해 지속적으로 자신에 대한 이해를 하다 보면, 나와 동떨어진 철학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자신이 만들었다고 해서 그것이 나와 깊이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낼 수많은 철학들 중에는 나와 관련이 없는 것도 있고, 나에게 해로운 것도 있으며, 반대로 나에게 이로운 것도 있다. 성찰은 정신계의 면역체계와 같아서 무엇이 나에게 해롭고 이로운지 알아낸다. 몸에서 면역체계를 유지하는 것이 신체 건강에 중요하듯이, 성찰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정신의 건강에도 중요하다. 무엇을 하든지 언제나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성찰이 좋다 하여 너무 성찰만 고집하고 집착하다 보면 역효과를 가지기 마련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이해를 하려고 며칠 내내 그 생각만 하는 것은 건강하지 않다. 순간마다 자신에 대해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일부 밖에 없으며, 나라는 존재는 시간에 따라 변한다.


대부분 성찰을 하기 위해 과거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동일한 사건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가 그 사건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바뀔 수 있다. 살면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깨닫기 때문이다. 또한 수용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다면, 이전에 원망스럽고 화났던 일에 더 이상 부정적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성찰은 과거의 사건에 대해 느끼는 감정의 치료에 목적이 있지 않다. 성찰의 기저에는 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려는 마음이 있다. 질병이 있다면 고쳐야 하겠지만, 질병이 없는 사람은 병원에 가지 않는다. 하지만 성찰은 별다른 질병이 없는 사람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보다 내일 더 많은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지하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성찰은 메타인지와 다르다. 성찰은 실천으로 이어진다. 성찰을 통해 자아는 발전한다. 예를 들어 남을 헐뜯는 습관이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 사람이 스스로 돌이켜보고 섬세하게 관찰해 보니, 가까운 사람을 헐뜯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관찰). 왜 그런지 알아봤더니, 부모님이 주로 나를 헐뜯었던 적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모님도 그 부모님이 헐뜯었기 때문에 나를 헐뜯었고, 부모님이 나를 헐뜯었기 때문에 나도 주변 사람을 헐뜯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해). 이를 통해 부모님의 행동과 나의 행동을 이해하고 수용하게 되었다(수용). 스스로를 수용하면서, 주변 사람들을 헐뜯는 행동을 줄이게 되었다(실천). 메타인지는 관찰에서 끝날 것이다. 우리의 삶이 더 나아지기 위해서는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관찰에서 이해, 수용, 그리고 실천까지 이어지는 성찰을 통해 우리의 삶은 나아질 수가 있다.


삶은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만이 성찰을 할 수 있으며, 성찰을 하는 사람만이 실제로 삶을 나아지게 할 수 있다. 아무리 많은 철학 지식을 습득한다고 하더라도, 그 지식은 원래 우리의 자아 그 위에 올려져 있을 뿐이다. 마치 원래 있던 그림에 색만 덧칠한 것과 같다. 이렇게 저렇게 색을 칠하다 보면 그림이 변한다고 느낄 수 있지만 사실은 그저 똑같은 그림에 색만 입히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색을 더 많이 칠하면 칠할수록 원래의 그림이 어떤 그림이었는지 잊어버리게 된다. 성찰이 없이 너무 많은 지식을 습득하게 되면, 자아가 흐릿해지며 지식이 곧 자아라는 착각을 하게 된다. 니체의 철학 이론을 아주 세세하게 이해하고 누구한테라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니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당신인 채로 니체라는 지식을 얻었을 뿐이다. 철학만을 추구하다 보면 지식의 늪에 빠질 수 있으며, 머지않아 허우적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철학과 성찰은 함께 가야 한다.


자신을 이해하고자 성찰을 하다 보면 자신 안의 다양한 것들과 마주하게 된다. 그중에는 어린 날에 뒹굴던 푸르른 풀밭처럼 싱그러운 것도 있겠지만, 전쟁이 끝난 곳의 악취와 같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도 있다. 좋았던 일과 나빴던 일 모두 현재의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할 때, 일하면서 주변 동료와 갈등이 생길 때, 부모님에게 툭툭 던지는 말들에 우리의 과거가 녹아있다. 우리는 사람의 심리를 보여주는 예능 프로그램이나 영화, 드라마는 즐겨보고 전문가처럼 사람들의 심리를 분석하곤 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너무 모른다. 철학과 과학이 인간은 모른다는 것에 대한 인정으로부터 시작하듯이, 성찰은 자기 자신에 대해 모른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시작이 된다.


우리는 경쟁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내고, 살아남기 위해 자본을 늘려야 하는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많은 것이 숫자로 환산되어 가치를 나타내고, 삶은 SNS라는 전시장에 진열되곤 한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며, 무의식적으로 남들을 평가하고 비교 우위에 서려고 한다. 이런 사회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이해하고, 수용하며, 실천을 통해 삶을 나아지게 만드는 것은 어렵다. 당신은 끊임없이 방해를 받을 것이다. 무엇을 하려면 자격증이 있어야 하는 시대이기에, 자신만의 철학을 만들려면 철학 학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자기 자신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한다고 돈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기에 이 시간에 좀 더 생산적인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당신이 가려는 길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마음을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끝마쳐야 할 과제도 아니고, 누군가의 평가를 받아야 하는 시험도 아니다. 또한 많은 자원이 들어가야 하는 일도 아니다. 그저 나 하나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다. 인생을 나로서 살고 싶어 하는 나라는 존재 말이다. 자아가 인생을 갈망하는 한, 삶에 대한 고뇌는 지속될 것이다. 만약 너무 일찍 '완성'을 해버리면 당신의 삶 또한 멈춰버릴 것이다. 이 세상에 살다 간 사람 중 누구도 완벽히 지혜로운 사람은 없었다.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이해한 사람도 없었으며, 어디에나 적용되는 법칙을 발견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니 우리의 철학과 성찰은 완벽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당신이 지금 여기서 자신에 대한 이해를 멈추고 그에 따라 살게 된다면, 천동설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당신은 유연한 사고방식을 버리게 될 것이며 세상을 고정된 것이라고 바라보게 될 것이다. 완성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는 것이 좋다.


나는 35년간 살면서 인생에 여유를 두는 법을 배웠다. 특정한 것에 너무 몰두하다 보면, 시야가 좁아지고 사고가 굳어지게 된다. 너무 깊은 곳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 내가 추구하는 삶은 어제보다 오늘 더 나은 인간이 되는 삶이다. 이런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속성'이다. 멈추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나를 너무 몰아붙이지 않아야 하고, 너무 큰 고통을 스스로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때로 너무 큰 고통이 올 때, 모든 것을 놓아버리기 때문이다. 나를 여유롭게 바라보며, 오늘이 안되면 내일 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나의 인생을 '나'로 100% 채우지 않고 여러 가능성을 열어 두다 보면 여유가 생기고 고통이 줄어든다. 철학이든 성찰이든 하나만 붙잡고 있는다고 기적적으로 깨달음이 생겨나거나 인생이 변화하지 않는다. 진지한 태도로 임하는 것은 좋지만, 철학과 성찰을 지속하게 만들어주는 힘은 건강한 삶이다. 언제나 삶에 여유를 남겨두고, 사람들과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고, 운동을 통해 몸을 건강하게 만든다. 새로운 것이 있다면 탐험해 보면서 중간중간 자기 삶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내가 지난 세월 터득한 철학과 성찰을 하는 법이다.


그러니 현재 삶에 여유가 없어서 철학책을 읽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못한다고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 시간적 여유가 생겨서 하루 종일 철학책을 읽을 수 있다고 해도, 삶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간을 더 쏟을수록 집착하게 되면서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모든 것에는 적절한 시기와 속도가 있는 듯하다. 당신의 인생에서도 자신만의 철학을 만들게 될 적절한 시기가 있을 것이다. 당신에게 말하고 싶은 것 한 가지만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삶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당신이 삶에서 어떤 시기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삶이라도 더 나아질 수 있다. 삶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도저히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면, 나도 같은 경험을 했다는 것을 기억해 주면 좋겠다. 당신은 그저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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