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에세이집 14편
"맥주를 누가 시원한 맛으로 먹는다 했나,
맥주는 분위기 맛으로 먹는 거였다."
시골만 내려갔다 하면 술을 많이 마셨다. 이번 추석도 다르지 않았다. 길었던 연휴만큼이나 마신 술의 양도 꽤 되었다. 왠지 모르게 시골에서 친척들과 마시는 술은 달랐다. 좀 더 맛있기도 하거니와 마음이 편안했다. 확실히 핏줄이 연결되어서일까. 어른들 앞이라 눈치도 보이고, 행동거지도 조심하게 되는데도 오히려 또래 친구들과 마실 때보다 편했다. 나만 유별나게 그런 걸 수도 있겠지. 그런데 굳이 나서지도, 내 이야기를 꺼내놓지 않아도 돼 좋았다. 그래도 우리 친척들은 대학 졸업반인 내게 꼬치꼬치 캐묻지 않아 좋았다. SNS 상에 떠도는 ‘잔소리 메뉴판’을 적어도 우리 친척들에게는 들이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냥 있는 자리에서 술 한 잔에 기대어 즐길 줄 아는 분들이었다.
이번 명절에는 마당에 깔개를 깔아놓고 대낮부터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맥주 피쳐만 열여덟 개를 비웠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함께한 사람들도 그만큼 많았다. 이번 추석 외할머니 댁은 유난히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큰 이모, 작은 이모, 넷째 삼촌, 막내 삼촌, 사촌 형들, 사촌 조카들까지. 일일이 세어보진 않았지만 스무 명은 가뿐히 넘는 듯했다. 술을 마시지 않고 운전기사를 자임한 형이 술 배달까지 맡아 주었는데, 총 네 번이나 차를 끌고 마트에 다녀왔다. 마시다 보니 즐겁지 아니한가. 또, 사촌 누나 내외가 마시는 도중에 오는 등 자리에 새로운 인원이 계속 충원이 되었다. 사실 나도 중간에 합류한 인원이었다. 꿀맛 같은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친척들의 큰 웃음소리에 잠에서 깼다. 한데 그 웃음소리만 가만히 듣고 있어도 기분이 좋더라. 그간의 고민들이 잠시 잊혀지더라. 어쩌다 보니 나도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이끌려 자리를 함께하게 된 거였다. 최근 술을 줄이고 있던 시기였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맥주 맛이 좋았다. 맥주를 누가 시원한 맛으로 먹는다 했나, 맥주는 분위기 맛으로 먹는 거였다.
역시나 아빠가 가장 신이 났었다. 어느 자리든 항상 아빠가 자리를 주도했다. 맥주라면 끝을 모르는 아빠는 형에게 맥주 배달을 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아빠의 큰 웃음소리가 집 밖 저 멀리까지 들린다고 큰 외숙모가 우스갯소리로 말하기도 했다. 아빠의 웃음소리는 원래 크긴 하다. 자리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며 그렇게 웃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별 얘기 아니었던 것 같은데 대화와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그게 좋았다. 그냥 별 이유 없이 즐거운 거. 일 년에 한두 번 보기 힘든 친척들인데 이렇게 만나기만 하면 즐거웠다.
아빠가 신이 난 데에는 아침 생신파티가 한 목 했던 듯하다. 항상 추석 다음 날이 아빠 생신이어서 생신상을 매번 시골에서 맞았다. 그런데 가족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까지 축하를 받는 게 조금은 부담스러웠던지, 아빠는 이번 생일파티는 하지 말자 했었다. 아빠의 빤히 보이는 빈말이었다. 생일 당일, 엄마는 아침부터 미역국을 끓이고, 나는 전날 케이크를 사고, 형은 현금을 선물로 주었다. 그랬더니 아빠는 얼마나 좋아하던지. 연휴가 끝나자마자 아빠는 손수 케이크를 자르는 사진으로 프로필 사진을 잽싸게 바꾸었다. 그 기분이 자연스레 맥주 파티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번 연휴가 무척 길었다. 그러나 특별히 한 건 없다. 남들은 연휴를 이용해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던데 나는 그냥 집에서 쉬었다. 집에서 쉬는 게 제일 좋았다. 그래서 그런지 특별한 일정이었던 시골에서의 하룻밤의 여운이 다른 때보다 더 오래 남았다. 뜬금없는 말이지만 나는 내 가정을 꾸릴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행복한 자리를 만들 수 있을까. 가족적인 정이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으면 바라는데 괜한 걱정이 들었다.
2017.10.10.
작가 정용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