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에세이집 16편
[감성에세이] 영원한 이성친구가 있을까
요즘은 친한 친구라 해도 일 년에 두 번 보면 많이 보는 거였다. 서로 바빠 자주 보기 힘들었다. 몇 주 전부터 미리 약속을 잡아놓아야 그나마 오랜만에 한 번 볼 수 있었다. ‘미모 1등 여사친(몇 명 되지 않는 내 여사친 중 가장 예쁜 친구이기 때문이다)’을 본 지도 그렇게 벌써 반년이 훌쩍 넘었다. 그전부터 약속만 잡기를 수차례. 서로 바쁜 일정 탓에 약속은 번번이 깨지기 일쑤였다. 요즘 그나마 내가 여유로운 생활을 보내고 있어 만날 수 있었다.
그녀와는 이 년 전, 동아리를 같이 하며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도중에 그만두었으니까, 대략 반년 정도 함께한 사이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사실상 반년뿐이라 남자, 여자를 떠나 지금까지 연락을 주고받은 건 드문 일이었다. 활동 당시 그녀와 그다지 친하지도 않았는데. 다들 그렇듯, 그렇게 만난 사이는 대부분 자연스레 소원해지기 마련이었다.
미모 1등 여사친은 주위 친구들 중 가장 예뻤다. 물론 동아리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웠다. 그런데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 건, 그런 그녀가 여태껏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녀에게만 유독 연애 복이 따르지 않았다. 예쁜 외모 덕에 구애하는 남자가 줄설 것 같은데, 본인은 전혀 없다며 한탄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말을 여전히 믿지 못했다. 아니, 남자가 없을 수 없었다. 심지어 올해 초 국내 굴지의 기업에 입사했는데. 나이도 어리고, 얼굴도 예쁘고, 신입사원인데, 남자가 없다고?
솔직히 말하면, 미모 1등 여사친은 내게 단지 친구이기보다 이성에 좀 더 가까웠다. 친구의 감정보다 이성의 감정이 더욱 컸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어딘가라고 해야 할까.
선선한 가을 기운이 거리를 휩쓰는 초저녁, 우리는 4호선 숙대입구역 부근에서 만났다. 그녀는 퇴근을 하자마자 그곳으로 바로 넘어왔다.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는 거였지만 서로 어색해하지 않았다. 그저 반가운 마음이 컸다. 그녀는 처음 보는 동그란 금테 안경을 쓰고 나왔는데 일이 힘들었는지 몹시 피곤한 인색이었다. 아마 최근 앓고 있다는 피부염 때문인 것 같았다.
어딘가 모르게 그녀는 변해 있었다. 그날 그녀는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데도 무언가 예전보다 밝아진 느낌이랄까. 예전에도 노는 걸 좋아하긴 했어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표현하기보다 앞에서 이끌어주는 대로 조용히 따라오는 편이었는데, 그날은 달랐다. 그녀는 전체적으로 활기찼다.
우리는 일본 가정식 집에서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해결한 뒤,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 술 많이 늘었어.”
그녀는 술이 늘었다며 내게 자신 있게 말했다. 술집은 시끌벅적했다. 근처 회사 신입직원으로 보이는 백여 명의 회사원들이 그곳을 점령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내뿜는 에너지는 상당했다. 마치 대학교 신입생처럼 밝고 풋풋한 기운이 넘쳐났다. 그러다 보니 우리도 덩달아 신이 났다. 한 잔, 두 잔. 계속해서 잔을 부딪쳤고, 테이블 위로 술병이 여럿 쌓여갔다. 그런데 아뿔싸, 그녀가 갑자기 취해버렸다. 그래도 주량에 맞게 서로 조절을 해오고 있었다고 여겼는데, 그녀는 아니었나 보다. 알딸딸한 기운이 싹 가시면서 정신이 바짝 들었다. 급기야 그녀는 토를 하겠다며 허겁지겁 화장실로 향했다. 큰일이다 싶었다. 전철 막차 시간도 다가오는데 초조한 마음이 커져만 갔다.
그런데 내가 취해서인지 아니면 그녀의 약한 모습을 보아서인지, 그녀를 향한 애틋한 감정이 일었다. 일종의 보호 본능이었던 것 같다. 안 그래도 예쁜 친구가 비틀대는 모습이 무척 귀여워 보였다. 많은 감정이 마음을 스쳐 지나갔다. 일단 그녀를 챙겨주려 애를 썼다. 편의점에 들려 헛개수 음료를 사 그녀의 손 안에 쥐어주었다. 나는 그렇게 내가 내려야 하는 역을 지나치며 다섯 정거장을 더 갔다. 가는 동안 도중에 두 번이나 내리기도 했다. 그녀는 내리자마자 쓰레기통에 엎드려 토를 했다. 나는 그녀의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그녀의 입 주위를 닦아주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안쓰러웠다. 후회가 되었다. 적당히 마셨어야 했는데. 그녀는 졸음이 밀려오는지 의자 위에 앉자마자 꾸벅꾸벅 졸았다.
“정신 차려야 해. 집에 가기 전까지 잠에 들면 안 돼.”
나는 간신히 마지막 전철에 그녀를 태워 보냈다. 그리고 나도 반대 방향으로 넘어가 승강장으로 들어서는 전철을 탔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에 들면 분명 그녀가 내려야 하는 역을 그냥 지나칠 것만 같았다. 전화를 절대 끊지 말라며 계속 말을 걸었다. 그렇게 다행히 그녀는 집에 무사히 들어갔다.
나도 집에 도착했는데 여전히 애틋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헷갈렸다. 술기운 때문인지 그녀를 좋아하게 된 건지.
무엇이 사랑일까.
순간의 애틋함도 사랑일까.
그저 일시적 감정일까.
결과적으로 말하면 다음 날이 되자 애틋한 감정이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한낱 일시적 감정이었을 뿐이다. 허무했다.
앞으로 그녀를 따로 만나는 걸 자제하려 한다.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의 진위보다 그 뒤에 오는 허무함이 너무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2017.10.25.
작가 정용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