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에세이집 17편
[감성에세이] 나도 내 확실한 마음을 잘 모르겠어
“확실한 마음을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새벽 1시, 그녀는 술에 취해 혀가 반쯤 꼬인 채로 전화를 걸었다. 당황스러웠고, 혹여나 내게 고백이라도 하면 어쩌나 염려가 되었다. 한편으로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우리의 관계에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선생님, 저한테 왜 그래요?”
“아니, 제가 뭘요.”
“왜, 사람을 가지고 놀아요?”
내 전공 특성 상, 대학생들이 청소년 기관에서 서포터즈 활동을 많이 하곤 한다. 그 이름을 봉사활동이라 부르기도, 기획단 활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기관마다, 사업의 성격마다 부르는 이름은 제각각 달랐다. 4학년인 나도 올해 한 기관에서 1년 가까이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졸업이 늦은 탓에 나이를 이유로 서포터즈의 대표를 맡게 되었다. 하는 일은 그다지 없다. 기관 선생님이 부탁하는 일을 주도해서 진행하거나, 참여자의 인원을 파악하는 일, 선생님과 서포터즈 중간에서 의견을 조율하는 일 등 학교 동아리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그녀는 그 서포터즈의 부대표였다. 우리는 일적인 이야기를 수시로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그녀는 일적인 파트너로서 최고의 사람이었다. 책임감이 있었고, 모든 사항들에 있어 대화로 풀려 노력했다. 때론 내가 털어놓는 일적인 스트레스를 귀담아 들어주었고, 상황에 따라 적절한 피드백을 주기도 했다. 그녀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매 순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자주 장난을 걸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 유난히 그 빈도가 높았다. 당최 장난을 잘 받아주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나 또한 장난을 걸면서도 혼란스러웠던 순간이 많았다. 내가 왜 그녀에게만 이렇게 장난을 치지? 혹시 그녀를 좋아하는 건가. 그러나 그에 대한 스스로의 답은 목을 타고 시원하게 넘어오지 않았다. 그녀가 막 좋다가도, 어느 순간 보면 큰 감흥이 없었다. 이 정도의 감정으로는 결판을 지을 수 없었다. 아니, 결판을 지어서는 안 되었다.
그런데 솔직히 고백한다.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애매하게 굴었다. 좋을 때는 좋은 대로 마음을 표했고, 생각이 나지 않을 때는 무관심하게 대했다. 그것이 그녀도 적지 않게 신경이 쓰였던 것 같다. 전적으로 나의 잘못이었다. 나의 잘못이긴 한데, 사람 마음이 원래 그런 것 같다.
확실한 게 어디 있어.
사실은 모든 것이 애매한데,
‘확실’의 옷을 입고 있을 뿐이지.
결코 그녀의 마음을 흔들기 위해서 고도의 전략을 쓴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정도의 두뇌 수준이 애초 되지 못했다. 그저 시간이 흐르면 그녀를 향한 마음의 농도가 짙어질 줄 알았다. 로써 또 하나 배웠다. 시간이 답이라 믿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 상대방은 확실한 나의 마음을 보여주길 원했지만, 확실하지 않은 것이 바로 나의 마음이었다.
혹자는 호감이 있다면 일단 시작해보라고 말한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이 사람, 저 사람, 다 만나보라 권한다. 그런데 그것이 쉬운 일이었으면 애초에 이러지 않았다. 상처를 주는 일, 또 상처를 받는 일, 그것은 결코 가볍게 다뤄져선 안 되었다.
맞다. 내가 유독 생각이 많은 탓이다. 굳이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까지 끌어와서 내 걱정으로 만든다. 겉으로 굉장히 쿨한 척 하면서 속은 굉장히 세심한 편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나는 그녀를 그 정도로 좋아하지 않는 거였고, 상대방도 내가 그 정도로 끌리지 않은 거였다. 만약 그 마음이 한쪽이라도 컸다면 이미 결과가 어떻게든 났을 것이다. 나도, 그녀도, 상대방이 받을 상처까지 생각하느라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결국 그녀와 한 시간 남짓 통화를 하면서, 나는 나대로 그녀는 그녀대로 솔직한 마음을 주고받았다. 나는 확실하지 않다는 마음을, 그녀는 이제 흔들리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다. 또 다른 의미에서 우리의 관계는 확실해졌다. 아마 나도 이제 그 확실해진 관계를 깨려 하지 않을 것 같다. 더 이상 나도 애매하게 굴고 싶지 않다.
사랑이든, 진로든, 꿈이든, 사람은 누구나 확실한 마음의 상태를 원한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수학 공식처럼 확실하게 떨어지는 일들이 인간사에 많지 않았다. 늘 불확실한 생태에서 확실한 상태로 가고 싶어 하는 ‘과정’만 있을 뿐이다. 어쩔 땐 확실함을 요구하는 세상이 억지 같고 위선 같다. 차라리 불확실하면 불확실한 대로 불안을 최소화하고 삶을 즐길 수 있는 방향으로 살아가는 게 낫다고 여겨졌다.
2017.11.04.
작가 정용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