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고서점을 좋아하는 편이다. 읽고 싶은 책을 두세 권 골라도 새 책 한 권 사는 값 정도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특정 책이 읽고 싶은 거였다면 나도 서점에 가 새 책을 골랐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건 또 딱히 없다. 내가 중고서점을 고집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그곳 분위기가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책을 고르는 내 모습이 좋다. 별도 정리 없이 마구잡이로 꽂혀 있는 책들을 하나하나 살피는 순간이 나도 모르게 위안이 된다. 그러다 운명처럼 눈에 띄는 책을 마주치면 바로 꺼내 들어 카운터로 곧장 가져가는 편이다.
책을 고를 때 내가 보는 것은 내용이 아니다. 나는 주로 책의 제목과 겉표지 디자인을 본다. 책의 제목이 일단 구미를 돋우면 꺼내 들어 겉표지에서 흘러나오는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살핀다. 청결상태는 깔끔한지, 디자인이 과하진 않은지, 겉표지에 쓰여 있는 글귀나 그림이 나를 혹하게 만드는지. 그 심사들을 최종적으로 통과하면 목차 정도만 훑은 다음 바로 카운터로 가져간다. 그만큼 나는 책의 제목과 디자인을, 어찌 보면 책의 내용보다 더 중요시하는 편이다.
<잘돼가? 무엇이든>은 일단 책 제목에서 바로 합격이었다. 메일을 통해 책리뷰 제의가 왔을 때, 제목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마음이 동했다. 제목이 ‘잘돼가? 무엇이든’이란다. 그 말이 어떤 영문으로 나의 마음을 흔들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기 때문일까. 단지 책 제목일 뿐인데 순간적으로 나는 그 짧은 문구에서 위로의 기운을 얻었다. 당연히 조금의 고민도 없이 바로 제의를 받았다. 결론은, 역시 좋은 제목과 디자인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2018년 7월 19일 출간된 이경미 감독의 첫 에세이 <잘돼가> 무엇이든> 책리뷰.
이경미 감독은 채널예스와의 인터뷰에서 “내 글의 성격이 비문이 특징이 되는 글들이라서, 어디까지 비문을 허용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신 걸로 안다.”라고 했을 만큼, <잘돼가? 무엇이든>은 글의 형식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로움’이 돋보이는 에세이다. 에세이보단 그냥 일기에 가깝다. 나는 오히려 그런 그녀의 ‘자유로움’이 좋았다. 글에서 그녀의 ‘진정성’이 보였기 때문이다. 셀럽으로서 이미지를 신경 쓰는 모습보다 오히려 그런 소박함이 더욱 진하게 와 닿았다.
얼마나 일기 같은가 하면, 엄마가 그녀에게 보낸 문자 내용을 그대로 실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려는 글이 아니라 그냥 일기장에 잊기 전에 기록해두는 글 같았다. 책 중간 중간에 그녀의 짤막한 메모가 담겨 있는데, 그것을 보면 더욱 와 닿았다.
“모레는 꼭 고기를 먹어야겠다, 몸이 원한다,
염치도 없는 이놈의 몸뚱아리.“
2014.01.06.
<잘돼가? 무엇이든>을 보면 그녀가 영화감독인지 회사원인지 가정주부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는다. 직업이 무엇이었든 그녀는 지금 같은 내용의 책을 썼을 것 같다. 그만큼 책 내용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일상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영화감독이 비교 우위에 서 있는 직업은 아니지만 겉멋 들기에는 충분한 직업이다. 스스로 예술가라 생각하며 ‘예술부심’을 부리는 사람도 많을 것 같다. 하기야 어느 정도 이름만 알려도 배우들을 쥐락펴락할 파워를 얻으니 어찌 보면 그럴 만도 하다.
한데 이경미 감독에겐 그런 겉멋이 없어 좋다. 왠지 옆 동네에 살 것 같은 소탈함이 묻어난다. 나는 그런 그녀의 담백함이 마음에 든다. 그저 하나의 직업일 뿐 사람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삶의 태도. 사소해 보일지라도 결코 쉽진 않을 길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영화감독만 그럴까, 일반 회사에서 직급만 올라가면 지가 최고인 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어쨌든
가고 있다.
-2003.11.10.
삶이란 무엇일까, 인생지사 세상 이치는 무엇일까, 고통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나는 대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문제로 뼈 빠지게 고민하면 뭐하나. 먼지만 한 실 하나가 20년을 단절시키는데. ‘새 삶’에 방점 찍고 애써 긍정적인 해석은 하지 말자. 아무리 봐도 인생 그냥 복불복이다.
창작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자산은,
습작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작가의 삶이다.(박완서)
아이 씨, 어떡하지.
-2005.05.12.
남한테 칭찬을 받으려는 생각 속에는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다.
혼자 의연히 선 사람은 칭찬을 기대하지 않는다.
물론 남의 비난에도 일일이 신경 쓰지 않는다.
-2005.08.05.
솔직히 그녀의 영화, <미쓰 홍당무> 이름만 들어봤지 본 적은 없다. 왠지 이경미 감독에게 빚진 기분이다. 이렇게 책을 재밌게 읽었는데 차기작이 나왔는데도 보지 않는 건 배신이 될 것 같다. 이 자리를 빌려 그녀에게 약속한다. 그녀의 영화가 단편영화든 상업영화든 꼭 영화관을 찾아가 내 돈 주고 본다고. 그리고 조만간 그녀의 이전 영화도 차근차근 챙겨볼 생각이다. 파이팅!! 어떤 발걸음이든 그녀의 행보를 응원한다.
# 본 리뷰는 [아르테]의 무상지원을 받고 작성한 글입니다
2018.08.09.
작가 정용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