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인간의 생사는 찰나의 순간이라고 나는 생각해왔다. 마음을 놓고 있는 사이 내가 어떤 일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당할지는 알 수 없었다. 평소처럼 출근길을 나서다가 급발진하는 차량에 치일 수도,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에게 ‘묻지 마’ 살인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지만 그것은 나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늘 집밖을 벗어나는 일이 생각보다 편하지만 않았다. 언제 어디서 당할지도 모를 위협에 항상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는 항상 신뢰가 갔다. <인셉션> 그랬고, <인터스텔라>가 그랬다. 그 밖의 명작이 수두룩했다. <덩케르크>는 큰 틀에서 전쟁영화다. 한데 적군의 모습은 영화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적 전투기만 몇 차례 등장할 뿐 실제 적군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이것이 <덩케르크>의 특징 중 하나였다. 존재는 하나 존재하지 않는 적.
나는 그것이 인간의 두려움과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처럼 어디서 튀어나올지 그 크기는 어떠한지 예상하기 힘들었다. 나와 같은 경우엔 ‘죽음’이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불을 끄고 잠에 들 무렵 항상 ‘현상 균열’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내 사랑하는 가족, 강아지, 혹은 내가 혹시 하루아침에 어떻게 되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일었다. 때론 그것이 나를 굉장한 무력감에 빠지게 만들었다. -2017년 7월 20일 개봉한 <덩케르크> 리뷰.
영화 <덩케르크>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덩케르크 해안에 고립된 40만여 명의 영국군과 연합군을 구출하는 작전을 그린 실화 바탕의 영화다. ‘덩케르크 탈출 작전’은 최소한의 피해로 철수에 성공한 세계 전쟁사에서도 유례없는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탈출을 돕기 위한 영국군의 군함이 적 전투기에 의해 번번이 격추되자 화물선, 어선, 유람선 할 것 없이 민간 선박들까지 동원되어 한 몸 한 뜻으로 만들어낸 값진 승리였다. <덩케르크>는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크리스토퍼 놀란의 손을 거치면서 굉장히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
<덩케르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사 양은 극도로 적었다. 주인공들마저 대사 대신 표정으로 감정을 전달했다. 40만 명에 달하는 군인들이 덩케르크에 몰려 있었지만 해안가는 잠잠했다. 간신히 선박에 올라타도 번번이 침몰되기 일쑤였다.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바다 위의 상황. 별 장치 없이도 영화의 긴장감은 높은 수준에서 유지됐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최대한 CG기술을 활용하지 않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구현할 수 있는 장면이라면 CG로 처리하기보단 직접 촬영을 선호했다. 과연 감독의 그러한 원칙을 <덩케르크>에서도 적용할지 한다면 어떻게 40만 군대를 영화에 녹여낼지 무척 기대가 되었다. 한마디로 역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었다. 관객들의 높은 기대 수준을 놀란 감독은 완벽하게 부응해냈다. 덩케르크 해안가를 가득 메운 40만 군대의 모습은 가히 진풍경이었다. CG를 전혀 쓰지 않았다 라고 말하긴 힘들겠지만 그것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은 충분히 엿보였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구현을 정말 잘하는 감독이었다. <인터스텔라>의 무중력 우주 연출도 그러했고 <인셉션>의 꿈 속 연출도 그러했다. <덩케르크>도 당시 시대상을 현실적으로 정말 잘 표현해냈다. 암울한 분위기, 긴박한 순간 등 인물의 대사 없이도 관객들의 몰입을 최대로 이끌어냈다.
인터넷의 한 포스트는 ‘’덩케르크‘ 숫자로 보는 놀라운 실화6’을 공개했다. 당시 탈출 작전이 얼마나 급박했고 위대했는지 한눈에 볼 수 있는 지표였다. 이 수치는 거기서 인용해왔다.
338,000명: 덩케르크 해변에서 철수한 군인의 수
68,000명: 덩케르크 작전 중 부상당하거나 생포된 연합군의 수
3,5000회: 영국 공군이 덩케르크 철수 작전을 위해 열흘 간 펼친 공중 작전의 수
75km: 연합군이 고립된 프랑스 덩케르크 해안에서 대영 해협 너머 영국 도버까지의 거리
15초: 600명의 군인을 태운 웨이크풀 호가 어뢰 공격으로 침몰하는 데 걸린 시간
4.2m: 작전에 참가한 최소형 선박 탬진의 길이
사실 전쟁 영화는 단순한 구조를 띠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군과 적군이 확실히 나뉘어 있고 도달해야 하는 고지가 명확히 존재하며 화려한 전투 신을 거쳐 결국에는 승리를 거두거나 탈출에 성공한다. 이것이 어찌 보면 전쟁영화가 갖고 있는 전형적인 구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덩케르크>는 전쟁영화지만 이러한 구조를 탈피하고 있다. 적군의 모습은 영화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으며 총알을 주고받는 치열한 전투 신도 <덩케르크>에서는 볼 수가 없다. 기존의 전쟁영화는 전장을 휩쓰는 영웅의 이야기에만 초점이 맞춰지지만 <덩케르크>는 당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데만 온힘을 쏟는다. 그래서 더욱 당시 상황이 현실적으로 와닿는 것도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는 믿고 본다. 일단 연출이 말도 안 되게 뛰어나다 보니 몰입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 놀란의 뛰어난 장점 중 하나가 디테일한 장치 설정에 있다. <인셉션>에서는 결말 부분에 기막힌 반전을 심어 놓더니 <덩케르크>에서는 하늘, 땅, 바다라는 세 공간의 시간 설정을 전부 다르게 하고 있다. 각각의 시간대가 하나로 연결되니 극중 긴장감 또한 몇 배로 증폭됐다. 이 영화는 다른 건 몰라도 영화 연출 하나만큼은 역사적으로 기록될 만한 명작이다. 악역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영화 내내 긴장감을 유지한 건 정말 탁월한 능력.
2018.10.23.
작가 정용하
# 사진 출처 - 네이버 스틸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