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열기가 여전히 뜨겁다. 벌써 관객 수는 880만 명(12월 27일 기준)이 넘은 상태. 연말 연휴를 힘입어 1,000만 관객에 도달할 것이라는 전망도 충분히 가능하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지난 10월 31일에 개봉한 영화다. 며칠 만에 내리는 영화가 수두룩한 요즘 극장가에 두 달 가까이 그 간판을 유지하고 있다. 열기가 곧 사그라들 것 같더니 뒷심을 발휘해 현재도 종합 예매율 3위에 올라 있다. 이쯤 되면 궁금하지 않나.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대체 어떤 매력이 있길래 이토록 오랜 사랑을 받고 있는 걸까. 그러한 궁금증을 결국 못 이기고 나는 개봉한 지 두 달 만에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고 왔다.
평소 롹에 대해 아무런 식견이 없던 나는 프레디 머큐리나 밴드 ‘퀸’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이번 영화를 통해 그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다. 물론 살면서 ‘We Will Rock You'나 ’We Are The Champions'와 같은 노래는 들어왔다. 그러나 그 노래를 부른 사람이 프레디 머큐리란 것을, 그 밴드의 이름이 ‘퀸’이라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90년대 이후 출생자라면 나와 같은 사람이 아마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프레디 머큐리나 밴드 ‘퀸’의 존재에 대해 몰랐던 사람도 이 영화에 푹 빠질 수 있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존재를 알았던 알지 못했던 그와 관계없이 극장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화를 신나게 즐길 수 있다. 나도 방방 뛰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앞으로 프레디 머큐리란 인물을, 또는 밴드 ‘퀸’을 가까이 하며 살 것 같다. 이미 나의 플레이리스트는 그들의 노래로 꽉 찼다. 한동안 그들의 노래가 나의 귀를 즐겁게 해줄 것이다. 영화 <비긴어게인>의 노래가 그랬던 것처럼. 영화 <라라랜드>의 노래가 그랬던 것처럼. 영화 <미녀와 야수>의 노래가 그랬던 것처럼. 영화 <겨울왕국>의 노래가 그랬던 것처럼.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롱런하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이 영화가 우리의 ‘무엇’을 자극하길래 이토록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는 걸까. 영화를 보고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그리고 나는 그 궁금증에 대해 스스로 답을 내렸다. 우리가 <보헤미안 랩소디>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던 확실한 이유에 대해.
그것은 바로 자유라는 이름. 퀸의 노래가 우리의 욕망을 자극한 것이다. 프레디 머큐리를 포함한 밴드 ‘퀸’은 자유 그 자체다. 그들은 자유를 노래한다. 얽매이지 말고 마음껏 뛰어놀라 메시지를 전한다. 그들의 노래 앞에선 우리도 자유롭다. 그 욕망이 우리의 심장을 자극했던 건 아닐까.
한편으로 그만큼 우리의 현실이 꽉 막혀 있다는 것.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정해진 틀에 맞추어 사는 삶이란 답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꿈꾼다. 프레디 머큐리처럼 자유로운 삶을. 그의 말로가, 그의 성정체성이 어떠하든 그는 자유로웠기에 우리는 그를 선망하는 것이다.
현재의 우리는 자유를 느낄 수 없는 걸까. 그 길이 아예 막혀 있는 걸까. 현실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만약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확실한 건 우리는 날마다 짧게라도 자유를 맛보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이 답답한 삶을 버티고 이겨낼 수 있다.
자유롭기 위해 자신만의 공간을 찾아야 한다. 남들이 간섭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공간. 법에 위배되지 않는 선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 나는 그 공간으로 블로그를 추천한다. 블로그 안에서만큼은 나도 자유로울 수 있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처럼 공개된 SNS라면 할 수 없었던 이야기도 블로그에서는 할 수 있다. 블로그를 충분히 나만의 아지트로 만들 수 있다. 물론 나만의 오프라인 공간이 있다 하면 더 좋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스토리는 딱히 없다. ‘퀸’ 밴드 결성부터 인기를 얻는 과정, 그리고 위기에 빠지고 재기에 성공하는 과정까지 프레디 머큐리란 한 가수의 인생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영화는 팩트와 다른 부분이 많다고 한다. 프레디 머큐리가 죽은 후 퀸을 대변하고 있는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가 “관객들이 한 편의 디즈니 영화를 보듯이 즐겼으면 한다. 이 영화는 퀸의 영화가 아니라 프레디의 영화다.”라고 한 것을 보면 이 영화를 굳이 팩트로 접근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냥 하나의 허구적 영화로 즐기는 데만 몰두하면 될 것 같다.
그래도 프레디 머큐리의 게이로서 삶은 세세하게 다뤄진 편이다. 성정체성이 밝혀지고 나면서부터 그가 타인에게 어떠한 시선을 받고 얼마나 고독한 삶을 살았는지 영화를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로부터 무려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성소주자의 삶은 큰 틀에서 달라진 부분이 없었다.
그러니까 성공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울에 불과한지 영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프레디 머큐리의 천재성, 세계적 명성, 막대한 부,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도 알 수 있었다. 사회적 기준으로만 본다면 그는 성공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누구보다 불행하고 고독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통해 확실히 깨달은 바가 있다. 성공의 정의는 타인이 아닌 자신이 써내려가는 것이라고. 성공은 무엇을 성취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어떠할지라도 스스로 만족할 만한 삶을 살았다면 그는 성공한 인생을 산 것이었다. 중요한 건 타인의 기준이 아닌 자신만의 기준으로 사는 삶이 아닐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 자체로 성공한 삶이다.
그러한 점에서 봤을 때 프레디 머큐리는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정답은 그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스스로 충분히 만족스런 삶을 살았다고 여긴다면 그는 누가 뭐라 해도 성공한 삶을 살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수로서 화려한 커리어를 쌓았다 해도 그 스스로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는 실패한 인생을 산 것이다. 그렇다면 묻겠다. 당신은 만족스런 삶을 살고 있는가. 자신이 생각하는 만족스런 삶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지금도 열심히 애쓰고 있는가.
2018.12.28.
작가 정용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