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여러분의 마음속 'One Pick' 영화는 무엇인가. 저마다 하나씩은 품고 있지 않은가. 나는 이 영화(이터널 선샤인)를 내 인생 최고의 영화로 꼽는다. 그것은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최고의 영화를 꼽으라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꼽는다. 대체 이 영화의 매력이 무엇이길래. 어떤 것이 나와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걸까. 확실한 건 명작 영화는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볼 때마다 새롭다. 그것은 단순히 소모되는 게 아니라 특별한 여운을 남기는 영화이기에 그렇다.
인연.
이 영화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만날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것. 누가 훼방을 놓아도 결국 만나게 돼 있다는 것. 결국 또 싸우고 상처 주고 질려 할 거면서 인연과의 만남은 피할 수 없다. 당신은 운명 같은 사람을 만난 적 있는가. 대부분 그런 인연을 만나지 못해 이 영화에서나마 대리만족을 느끼고, 본인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영화(이터널 선샤인)가 꾸준히 사랑받는 것도 현실에선 그러지 못하다는 반증일 수 있다.
조엘: 나한테 눈곱만이라도 관심을 보내는 여자는 왜 다 마음에 드는 걸까?
- 영화 <이터널 선샤인> 명대사
나에게도 운명이라고 할 만한 일들이 있었을까. 한 번 돌이켜보게 되었다. 누가 우리를 강하게 연결시켜 준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누굴 만나든 이 시점에 만나 안면을 트고 대화를 나눈다는 게 운명이라고. 꼭 깊어지지 않더라도 이 시간에, 이 장소에서 마주친 건 운명이라고. 내가 만약 선택을 조금만 달리했다면, 그러니까 이곳 용산에 살지 않거나, 다른 대학교에 갔다면, 또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맺고 있는 인연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조금만 선택을 달리 했어도 만나지 못할 운명을 나는 지금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관계가 기막힌 인연일 수밖에.
그러나 모든 관계가 기막힌 인연이라고 해서 모든 관계가 좋았다는 건 아니다. 내게 악영향을 끼친 존재도 어쨌든 인연은 인연인 셈이다. 그들도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들을 만난 건 내 선택 사항이 아니었다. 정해져 있는 운명을 따랐을 뿐. 그러니 떠나간 인연에 지나치게 마음 아파할 필요도 없다. 그저 인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가 좋은 인연이었다면 그렇게 끝나진 않았을 거다. 그냥 또 다른 운명에 기대를 갖고 기다리면 된다.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을지 모른다.
인연은 언젠가 찾아온다는 말을 요즘 많이 듣는데,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인연이 평생 찾아오지 않는 것도 그 사람의 운명일 수 있다. 어떻게 모든 사람의 인연이 그렇게 공평하게 고루할 수 있겠는가. 그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는다. 누구는 많게, 누구는 적게, 주어질 수 있다. 그 불공평함이 세상의 진리다. 그렇게 생각하면 인간관계로 마음 아플 일도 조금은 줄지 않을까. 조금 더 의연한 삶을 살지 않을까.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믿게 되었다.
인연은 한 사람의 의지만으로 맺어지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끌려 해야 인연은 완성된다. 그것은 영화(이터널 선샤인)에서도 드러났다. 남자 주인공 조엘은 말수도 적고 심심한 삶을 사는 사람이다. 대체로 이런 남자는 이성에게 인기가 별로 없다. 먼저 다가가는 성격도 못 돼서 이성이 따르지 않는다. 그런데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은 그에게 호감을 가졌다. 쾌활하고 말 많고 즉흥적인 그녀는 진중하고 무게 있는 조엘이 매력적으로 느껴진 것이다. 원래 누구나 반대 성향의 상대에게 호감이 생기지 않는가. 반대로 조엘이 클레멘타인에게 느낀 감정도 마찬가지었을 것이다. 그러니 둘이 인연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아무리 상대에게 매력을 느껴도 상대가 그렇지 않으면 둘은 인연이 될 수 없다. 한 사람이 억지로 관계를 붙일 수 있을지 몰라도 서로가 원치 않으면 금세 떨어지게 돼 있다. 그러니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상대가 별 감정이 없는 것 같다면 일찍 포기하는 것도 괜찮다. 물론 그 전에 어느 정도 호감 표시를 해야 하는 것이지만, 했는데도 반응이 없다면 그건 포기하는 게 맞다. 괜히 상대의 작은 행동에 의미 부여 해가며 마음 졸일 필요가 없다. 상대도 당신이 마음에 든다면 어떻게든 표시를 할 것이다. 그게 인연이고,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인연이 아닌 사람에게 괜히 마음 아파하지 말자.
이제 나도 나에게 매력을 느낀 사람 하고만 교제를 할 것이다. 비단 연애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를 그렇게 할 것이다. 더는 내게 애정이 없는 사람까지 챙기지 않을 것이다. 그래 봐야 소용 없단 걸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예전엔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 했는데, 이젠 반대 성향의 사람을 만나려 한다. 나와 비슷한 사람은 나를 좀 더 이해해주고 보듬어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내 모습에서 자신의 약한 부분을 발견하게 되는 것 같다. 그 점이 그녀를 더 힘들게 할 것 같다. 차라리 반대 성향을 만나 나에게 없는 것을 가진 상대에게 깊은 매력을 느끼면서 연애를 하고 싶다. 상대를 매력적으로 느끼는 것이 연애를 하는 데 있어 더 중요한 것 같다. 애초에 이해를 바라는 건 욕심이고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이터널 선샤인)가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인연은 어떻게든 맺어진다, 그것뿐일까. 그렇다면 하워드 박사(톰 윌킨슨)와 내연녀(커스틴 던스트)처럼 결국 인연이 깨지는 이유도 반복된다는 것일까. 영화는 인연이 맺어진다는 것까진 메시지를 확실하게 전달했지만, 다시 만났을 때 기존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말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같은 문제로 깨질 수 있다는 것을 넌지시 암시했다. 해피엔딩이긴 한데 어째 그 끝은 정해져 있는 듯한 불길한 예감. 당신은 그 끝을 어떻게 예상하는가.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새롭게 잘 만날 수 있을까. 아니면 같은 이유로 또 헤어질 것이라고 보는가.
만약 실제로 기억을 지워주는 병원이 있다면 당신은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는가. 단, 영화에서처럼 한 사람에 대한 모든 기억이 휘발된다. 나는 있다. 내게 상처를 준 모든 이를 싹 다 날리고 싶다. 물론 그들과 좋은 기억도 있었지만 지금 같아선 다 날려 버리고 싶다. 그들에게 받은 상처가 여전히 내 가슴에 머물러 나를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다. 관계에 있어 더 이상 적극적이지 못할 것 같다. 자꾸 주저하게 된다. 그러나 기억을 지운다 해도 새로운 상처는 생겨날 것이다. 지금 나의 행동은 과거 특정 상처로 인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갖고 있었던 내 기질적인 문제이기에. 그것은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인정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수밖에는 없다.
2019.09.12.
작가 정용하
# 사진 출처 - 네이버 스틸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