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하 에세이
K와 술이 아닌 일로 만나는 건 거의 처음이었다. 지난번에도 밥이나 먹자며 만나려고 했지만, 다른 친구가 합석하는 바람에 결국 술자리가 돼버렸다. 나도 술 아닌 일로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럴 일이 드물어서 그렇지 피하는 건 아니다. 그날은 어차피 일이 쌓여 있던 터라 K가 술 마시자고 했어도 내가 거절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다행히 그 친구도 할일이 있었고, 우리는 저녁을 먹고 카페에 가기로 했다.
카페에서 같이 일을 하는 게 얼마만인가. 대학 시절 시험 기간에 종종 카페에 모여 같이 공부했던 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나는 카페에서 같이 무언가를 하는 걸 좋아한다.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는 건 어색하고 불편해도 말없이 같이 일하는 건 늘 좋아했다. 말 안 해도 통하는 느낌이랄까. 외롭지 않고 편안해서 좋았다. 그때는 내가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되었다. 가만히 안정감만 취하면 되었다.
K는 3개월간의 취업 준비 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한 회사에 취업을 했다. 본인 말로는 100% 만족하는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잘한 것 같다고, 이곳에서 어떻게든 버텨 커리어를 쌓은 다음 더 좋은 곳에 가겠다고 말했다. 그 의지가 현실과도 잘 맞물려 머지않아 현실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아무리 친구가 괜찮은 일꾼이어도 그곳의 인간관계에 따라 굳은 의지가 꺾이는 것을 나는 많이 봐왔다. 나 역시 그 불운을 피하지 못했다. 주식 시장 특성상 아침 일찍 출근하고, 늦게까지 일하게 될 일도 많다고 하던데, 아무렇지 않게 '그건 괜찮아' 라고 말하는 K가 조금은 안쓰러우면서 대견해 보였다. 부디 꼭 버텨서 나 좀 맛있는 것 많이 사줘라. 내가 그간 많이 사줬잖아.
나는 오후 8시부터 9시까지 교육이 있었다. 이번에 새롭게 시작한 '블로그 단기속성 프로젝트' 신규 참여자를 대상으로 블로그 알고리즘과 키워드 추출 방법에 대해 교육해야 했다. 그럴 때 프리랜서의 장점이 빛을 발한다. 프리랜서는 어디서든 일할 수 있다.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일할 수 있고, 가끔은 대화하면서도 일처리가 가능하다. 늦은 시간까지 일해야 하는 건 불운하지만, 그건 내가 투잡이라 그런 것이다. 얼마든지 상황에 따라 일하는 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 같이 창가를 바라보면서 앉아 나는 일을 하고 그 친구는 공부를 하는데, 대학시절 생각이 나서 좋았다. 그 시절의 향수는 요즘 어딜 가서든 툭툭 튀어나왔다.
일은 오후 10시쯤 마쳤다. 술 마시려고 만난 것은 아니지만 술이 빠질 수는 없지. 우리는 간단하게 마시기로 약속하고 근처 술집으로 이동했다. 아직 4월 초의 밤은 꽤 쌀쌀했다. 앉자마자 나는 시원한 생맥주를 시켰고, 쭉 들이켰다. 일 마치고 마시는 맥주의 맛이란. 그것도 금요일 밤에 마시는. 환상을 넘어 황금의 맛이다. 비록 막차 끊기기 전까지 마시기로 약속한 터라 더 달릴 수는 없었지만, K와 그 짧은 시간의 맥주 타임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 황홀하고 행복했던 밤이다.
K가 바빠질 터라 앞으로 그런 자리를 자주 만들진 못하겠지만, 가끔은 술 약속 말고 같이 카페에서 일하는 자리도 만들어야겠다. 그와 전보다 훨씬 더 가까워진 것 같고, 이제야 일상을 함께하는 친구가 된 것 같아 더욱 뜻깊었다. 그런 소소한 자리가 이제는 희소해진 이유도 있을 것이다. 대학 시절까지만 해도 일상을 함께한다는 건 굉장히 자연스런 일이었는데, 이젠 기회를 만들어야 가능하다. 나이를 먹어가는 것 같아 조금은 씁쓸하다. 그런 자리, 기회를 만들고 싶어 내가 독립서점을 개업하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손님들과 일상을 함께하고 싶어서, 그들의 일상에 나도 포함되고 싶어서, 그런 소소한 일상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 그럴 수 있을까.
2020.04.07.
작가 정용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