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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정용하 Jan 31. 2021

잊히지 않는 순간

정용하 에세이



우리는 반반 치킨과 생맥주 한 잔, 그리고 사이다 한 잔을 주문했다. 우리 사이에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나는 고개를 돌려 괜히 창 밖을 구경하는 척했다. 누가 말문을 먼저 열어야 하나 약간의 긴장이 맴돌 때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서 출국이 언제예요?"

"2주 후예요."

"아, 그럼 한창 바쁘실 때겠네요."

"뭐, 그렇게 바쁘지는 않아요."


그녀는 출국을 앞두고 있었다. 비교적 늦은 나이였지만 꿈을 위해 머나먼 유럽국에 가 대학교 신입생으로 입학한다고 하였다. 그녀의 열정에 내심 감탄했다. 나라면 절대 하지 못했을 선택이었다. 그녀는 이번에 떠나면 이제 국내로 영영 돌아오지 않을 각오도 하고 있었다.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선 국내보다 세계 무대가 맞다고 판단을 내렸다. 내가 봐도 맞는 판단이었다. 한때 잠시 마음을 둔 사람이었지만 언젠가 떠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선뜻 그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덧 출국이 다가오자 나의 선택이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날 사람에게, 돌아오지 않을 사람에게 마음을 주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분명 우리는 잘 될 가능성이 있었다.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걸지 모르지만 충분히 그럴 기회가 서로에게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의 꿈은 너무 컸다. 나는 그 꿈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기 어려울 것 같았다. 사랑하려면 꿈의 크기도 서로 맞아야 하는 걸까. 한 사람은 소박한 일상을 꿈꾸지만, 다른 한 사람은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길 꿈꾼다. 그 꿈 크기의 차이는 나의 마음에 걸림돌이 되었다. 이 사람에겐 내 마음을 못 주겠구나. 주어도 떠날 사람이구나. 그 불안한 사랑을 할 자신이 없었다.


우리는 치킨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자세한 얘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는 원래 술을 마시는 사람이었지만, 그 당시 술을 잠시 끊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나만 생맥주 두 잔 정도 먹고 일찍 일어났다. 아마 그녀도 술을 마셨다면 우리는 더 많은 얘기를 나눴을지 모른다. 비겁하지만 나는 여전히 술의 기운을 빌려 진심을 표현한다. 그건 진심이 아니라 순간의 감정에 이끌린 것이라 말하는 사람도 많지만 나는 진심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물론 진심이라 해서 무조건 옳은 방식은 아니다. 하지만 그때 우리가 술잔을 부딪치며 진심을 나눴다면 어떤 상황을 맞이했을까. 나는 지금도 가끔 그 이후를 상상한다.


아마 우리는 한 시간 만에 일어났을 거다. 애매한 시간에 가게를 나와 또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서로 어색한 공기를 나눴다. 여기서 헤어져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에 이번엔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여기서 한강 가까운데, 한강이나 걸을래요?"


저녁이 되어도 더위가 꺾이지 않은 8월의 어느 밤이었다. 찜통 같은 더위에 나는 땀으로 반팔티를 다 적셨다. 그녀와 걷는 지금이 분명 나쁘지 않았는데, 더위 때문에 그 순간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그녀와 나는 말없이 걷기만 했다. 그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처럼 더위 때문에 그저 허덕이고 있었을까. 나는 조금만 걷고 이제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더위 때문에 괴로운 것도 있었지만, 더이상 진전이 나지 않을 우리 관계에 별로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친구로 지내지는 못할 것 같았다. 나는 이성이라 생각하는 사람을 친구로 대하지는 못하겠더라. 한 번 이성이면 계속 이성이고, 한 번 친구면 계속 친구이다. 그 인식이 지금까지 바뀐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차피 떠날 사람이었다. 친구든 이성이든 다신 국내에 돌아오지 않을 사람에게 마음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돌아갈 지하철 입구 역만 찾고 있던 나와 말없는 그녀는 한 시간 넘게 걷기만 했고, 중간에 그녀가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주기도 했다. 가야 하는데, 속으로 되뇌면서 나도 모르게 계속 걷고 있었다. 그렇게 분위기에 이끌려 정처 없이 걷다가 우리는 한 대학교에 들어가게 됐다. 그녀의 모교였다. 그녀는 모교에 큰 애정을 갖고 있었는데, 교내에 들어오니 말문이 터지기 시작했다. 나도 그 대학교 근처를 많이 다녔지만 그곳에 들어간 건 처음이라 흥미가 생겼다. 또 나는 캠퍼스 투어하는 걸 웬만한 여행보다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갑자기 대화의 활기가 띠기 시작한 우리는 교내를 활보했다. 그러다 새롭게 지어진 기숙사 근처, 의자도 아닌 난간에 걸터앉게 되었다.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노래 들을래요?"


나는 금세 감상에 젖어 스마트폰으로 노래를 틀었다. 최대한 잔잔한 노래로. 그 당시 내가 줄곧 듣던 인디 밴드 노래로. 누구든 진심을 털어놓아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솔직히 내가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아도 자연스러워 보였을 것이다. 말을 꺼낼까 말까 고민하는 시간은 무심하게 흘렀다. 공백이 대화처럼 오가는 순간. 오랜만에 그 순간을 맛보았다. 3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가 잘 잊히지 않는다. 그만큼 그 순간이 내게 강렬했다. 말도 하지 않고 손도 잡지 않은 것이 차라리 나았다고 지금에 와서 생각한다. 그런 긴장감이 그 순간의 강렬함을 더욱 키워주었다. 평생 잊힐 수 없는 기억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때 교내에서 내려다 본 도시의 풍경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만큼은 그 도시가 내게 너무 낯설었다. 순간이 생생해지면 모든 것이 낯설어진다. 즉 여행이란 별게 아니란 생각을 한다. 지금 이 순간이 생생해지면 그곳이 어디든 여행이 된다. 그런데 생생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 순간이 인생에서 몇 번 오지 않아 아직 그 방법을 모르겠다. 한때 감성적인 노래를 들으면 생생해질까봐 인디 음악만 주구장창 들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명쾌한 답은 아니었다.


이상하게 덥지도 않았고, 시간이 멈춘 것 같았던 그때. 나는 지금도 그때가 가끔 생각난다.


-21.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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