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하 에세이
얼마 전 '친했던' 대학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선배는 5월에 결혼한다고 했다. 나는 축하를 해줬다. 한다, 한다, 하더니 드디어 하는구나. 하지만 솔직히 별 감흥이 없었다. 나는 그 선배에게서 마음 떠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그냥 옛정이 있으니 축의금만 평소 하던 금액 이상으로 하고 조용히 식을 보고 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선배가 내게 연락한 이유는 신랑 측에서 돈 받는 역할을 맡기기 위해서였다. 기분이 벙쪘다. 그렇게 주변에 사람 많은 티를 내더니 왜 내게 이런 중요한 일을 맡긴데. 친하다는 주위의 지인에게 맡기면 되는 일이었다. 나와 예전에 친했다 하지만 이젠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사이고, 심지어 작년에 만났을 때 크게 싸웠었다. 사실 이렇게 할 거면 앞으로 연락하지 말란 말까지 했었다. 여기서 이렇게란, 나의 안부는 전혀 물어보지 않고 자기 얘기만 할 거면, 이란 의미였다. 그 선배는 오랜만에 만나도 내게 '뭐 하고 지내'란 말을 건네본 적이 없었다. 내가 진로를 바꾼 지 3년이나 됐는데도 말이다. 그러면서 그 형은 묻지도 않은 자기 얘기를 몇 시간이고 떠들었다. 솔직히 이제 그의 이야기는 나와 관계없는 이야기라 공감되지 않았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한 이야기. 본인만 실컷 떠들었으면 형식적이라도 그 다음 나에게 뭐하고 지내는지 물어봐야 하는데 단 한 번을 물어보지 않았다. 그런 선배와 내가 무엇 하러 관계를 지속하겠는가. 그래서 연락을 끊었었다. 그렇게 일 년이 흘렀다. 그러고는 얼마 전 연락해서 본인이 결혼하고, 신랑 측에서 도와줄 수 없겠는지 물어온 것이었다. 대체 그 정도의 공감 능력으로 어떻게 결혼을 하겠다는 건지. 내가 앞에서 대놓고 역정을 냈는데도 모르쇠로 부탁을 해오는 뻔뻔함. 선배에 대한 남아 있는 정까지 싹 말라버렸다. 그런 부탁을 할 거면 한 번 만나자고 해서 밥 사주면서 하든가. 옛정이라 해서 관계를 질질 끌어왔는데 이젠 정말 끝에 다다른 느낌이다. 결혼식에 가서 축의금과 함께 남아 있는 정을 놓고 와야겠다.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관계를 끊기만 하면 정말 내 주위에 아무도 남지 않을 것 같단 것이었다. 지금도 술 한 잔 할 사람이 없는데 여전히 나는 있는 관계마저 잘라내고 있다. 인간관계란 상대가 나를 존중하지 않는 것까지 감수하면서 받아들이고 모른 채 해야 하는 것일까. 그래야 주변 관계가 좀 생기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평생을 쓸쓸해 해야 할 팔자다. 나는 상대가 나를 존중하지 않는데도 모른 채 하며 관계를 맺지 못한다. 그러면 그 존중이란 무엇일까. 적어도 상대를 무시하지 않는 태도. 하찮게 바라보지 않는 것. 그런데 나는 친한 관계에게서 그런 대우를 종종 받는다. 내가 무슨 무시받을 만한 행동을 했길래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나를 하찮게 여기는 듯한 말을 가끔 듣는다. 그럴 때면 순간 화가 나서 그 사람과 대화를 할 마음이 싹 사라진다. 그냥 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기분 나쁜 포인트를 딱 꼬집어서 상대에게 화를 표출할 수도 있지만 그건 왠지 싫다. 굳이 화라는 감정을 겉으로 폭발시키고 싶지 않다. 그러면 오히려 더 큰 화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냥 단념하고 기대를 버리는 것이 나의 마음 건강을 위해서 좋다. 그러면 상대는 영문도 모른 채 내 관계 목록에서 삭제되는 것이다. 물론 요즘은 선배에게 그랬던 것처럼 겉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렇게 해도 못 알아듣는 사람은 못 알아듣는다. 굳이 화를 냈던 나 자신에게만 책망하는 마음이 들 뿐이다.
새로운 관계의 수급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나는 매번 관계에 힘들어 하면서 관계를 갈구한다. 최근 1년 가까이 사람들과의 만남을 최소화하다 보니 물을 못 마신 것처럼 갈증이 난다. 어떻게든 사람을 만나야겠다. 이젠 단순히 친목을 다지기 위해 만나는 것보단 일을 목적으로, 또는 일과 관련 돼서 만나고 싶다. 친목을 즐길 만큼 시간이 없기도 하고 그런 관계가 더 생산적이고 의미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또 어찌 보면 그게 좀더 지속가능한 관계이기도 하다. 서로에 대한 존중이 깔려 있을 뿐 아니라. 나는 그런 관계에 매력을 느낀다. 그래서 최근 일적인 만남을 대폭 늘리고 있다. 오프라인 모임도 적극적으로 열 생각이다. 2021년은 사람과의 단단한 관계를 쌓는 데 좀더 집중하고 싶다.
어쩌면 봄이 와서 그런지 모른다. 봄엔 언제나 새로운 만남을 갈구했다. 늘 기대에 부풀었다. 올해도 역시 다르지 않다. 필요에 의한 행동보다 날씨에 의한 감정 변화에 가깝다. 내가 차리려는 독립서점이 항상 봄과 같은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늘 사람 만날 수 있는 기대감을 주는 곳. 지속가능한 관계를 쌓을 수 있는 곳. 그게 내가 독립서점을 차리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21.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