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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른손 Apr 11. 2019

<회고록#3 - 첫사랑 E(1)>

테킬라 선라이즈. 강렬하게 찬란하고, 아팠던.

나에게 첫사랑은 '첫 번째' 사랑이 아니다. 그렇다고 사랑이란 감정을 '처음' 느껴보는 것도 아니다. 첫사랑의 주관적 정의는 '눈물'을 자아내고 '소름'이 돋는 사랑이다. 쓰고 보니 참 말도 안 되고, 웃기다. 그러나 나에게만큼은 그렇다.


군대를 전역하고 나는 새로운 마음으로 세상에 자신을 내던졌다. 군 시절의 경험은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을 조금은 신중하게 생각하고, 한 번은 고심해보게 만들었다. 또 반대로 모든 역경을 이겨낼 무한한 용기를 주었다. 뭐든지 잘 해내고 싶었고, 실패하기는 죽어도 싫었다. 결과를 통해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모든 가능성에 최선을 다해 뛰어들었고, 세상에 노력과 의지로 못해낼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나의 학업, 친구, 진로를 완벽하게 이뤄내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충실하게 보내기로 했다.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시간이 나면 도서관에 뻔질나게 드나들며 문학적 소양을 쌓고 학업성적을 크게 향상했다. 목표를 위해 꾸준히 자신을 단련시키고, 땀을 흘리며 노력하고, 조금씩 성취해내며 '내 인생'을 가꾸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알게 되었다.


전역 직후, 나는 연애도 성공적으로 해내고 싶었다. 다시 한번 정말 열정적인 사랑을 꿈꾸었다.

한때, 운명적인 사랑을 믿었었다.


그 무렵 나는 후배 한 명에게 고백하고 차였다. 그러나 후유증은 크지 않았다. 개의치 않고 주변을 둘러보고 운명의 상대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언젠가 그 상대가 나타나면 내 한 몸 다 바쳐 사랑하리라. 매일 가던 동네 카페에서 E를 처음 보게 되었다. 평소에 관심을 주지 않던 주변을 더 유심히 둘러본 덕분에 새로운 인연의 시작이 예고되었다. 


어느 날, 어느 시간에, 그냥 문뜩 그녀를 발견했다. 커피를 주문을 할 때, 종업원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습관이 있다. 당연히 무례하게 굴거나, 싹수없이 굴지 않는다. 최소한의 격식, 원하는 주문을 말하고 감사하는 말과 함께 신속하게 자리를 뜬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달랐다. 주문을 하겠냐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끌려 눈을 쳐다봤다. 2초가 채 되지 않는 신속하지만 무한한 교감. 뭐에 홀린 듯이 그저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는 작고 갸름한 얼굴에 쌍꺼풀이 없는 야한 눈매를 가졌었다. 뺨에 수줍게 나있는 작은 점은 그녀의 고혹한 분위기를 더욱 농밀하게 만들어주었다. 작고 얇은 체리 빛깔의 붉은 입술. 귀여운 콧대와 뒤로 묶은 긴 머리는 내가 그동안 상상해왔던 '이상형'에 99%, 어쩌면 100%에 가까웠다. 순간 언제, 어디서 느껴본 적도 없는 강렬한 감정이 혈관을 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퍼져갔다. 약 1분간을 내 온몸이 마비된 채, 그녀에게 단번에 취했다. 간신히 주문을 마치고 나는 자리로 돌아와 내 감정을 다시 재정비했다. 이어서 나 자신과 대화가 이루어졌다. 


"야, 너 금사빠안하기로 했잖아. 정신 차려."

"이거 근데 느껴본 적 없어서 황당하네."

"근데 이성적으로 통제가 안 되는 걸 어떡해."


통제 가능한 감정이 아니었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이, 이상형을 만나본다는 것이 전부다 허무맹랑하고 픽션이라고 치부해왔었다. 그런데 웬걸, 느껴보니 다 맞는 말이네? 그날 이후, 나는 감성과 이성사이에서 끊임없이 협상한 결과로 한 가지 타협을 했다. '조금 시간을 두고 그녀를 알아가 보자'.


약 2달여간 주말과 금요일이면 그 카페를 다녔다.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매번 1시간을 공들여 머리를 매만졌고, 좋은 향을 위해 안 쓰던 향수를 뿌렸다. 최고로 깔끔한 옷을 빼입고, 책과 노트북으로 위장하여 카페에 공부를 핑계로 들락날락했다. 주문하는 짧은 순간마다 되지도 않는 농을 던지기도 하고, 일부러 고민하는 척 시간을 끌며 그녀의 얼굴을 감상했다. 점차 시간이 지나며 날바 라보는 그녀의 눈빛도 달라지고 있다는 점을 어렴풋이 느꼈다. 나를 의식하고 있었다. 얼굴에 작게 띈 홍조와, 날 바라보는 눈의 미세한 떨림, 살짝 깨문 입술, 모든 행동을 관찰했다. 점차 내가 있는 자리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내가 있는 테이블을 정리하고, 청소하며 잠깐잠깐 나의 상태를 보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럴 때면 슬며시 옆으로 다가가 청소를 돕기도 했고, 테이블을 옮기는 것을 도와주었다.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지만 우리 사이에 미묘하게 흐르는 야릇하고도 뜨거운 분위기는 더 이상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뜨거운 마음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미 마음의 크기에서 훨씬 벗어난 사랑과 호감이라는 감정은 흘러넘치고 있었다. 열렬히 사랑하고 싶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뜨겁고, 진득한 것. 내 심장을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어느 날 그녀에게 어색하게 운을 떼며 담백하게 물었다.


"저... 혹시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네... 네? 아, 네."

"혹시 남자 친구 있어요?"

"왜요. 없어 보여요?"


잠시 사고 회로가 멈췄다. 아, 망했다. 어떡해야 하지?


"아니요. 그냥 궁금했어요."

"없어요. 왜요?"


와우. 와우. 더할 나위 없이 좋구나.


"그럼 번호 좀 물어봐도 돼요?"

"만약에 싫다면요?"

"그럼..., 뭐. 어쩔 수 없죠..."


아.... 아.... 제발. 제발요.


"드릴게요. 주세요."

"진짜요? 아, 네 여기에 주세요."

"감사합니다."


세상을 다 가졌었다. 그랬다. 더 이상 부러운 것이 없었다. 기쁨에 겨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보다 더 큰 성공은 내 인생에 없으리. 나는 이 인연을 절대로, 절대로 놓치지 않으리. 세상 끝까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녀와 함께하리.


연락을 주고받으며, 다시 만날 날을 약속했다. 며칠 뒤 죽전역에서 그녀를 마주했다. 그녀는 뒷모습까지 이뻤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보고 뒤에서 한쪽 팔로 그녀를 감쌌다. 너무 기뻤다. 그래서 치아가 다 보이도록 빙그레 웃었다. 훗날 듣게 된 이야기지만, 그녀는 나의 해맑은 미소와 이런 행동을 보며 나에게 빠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격식 없고, 허물없이 그저 반가움. 껍데기가 없는 날것의 애정.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그렇게 변하고 있었다.


그 날밤 좋은 조명 아래, 근사한 식사를 하며 우주와 같은 대화를 나눴다. 그녀의 세계관은 다채롭고 신비했다. 과학교육을 공부하는 여대생이었다. 과학에 대한 무궁무진한 호기심과 열정이 멋져 보였다. 현대미술과 대중음악을 좋아했고, 남녀에 대한 분명한 가치관이 존재했다. 고양이를 좋아했으며, 그녀의 외가는 본래 월남으로 시작됐었다. 그녀의 지성은 섹시했고, 내면의 모습은 아름답고도 찬란했다.


"정말 너무 진부한 이야기라 못 믿으실 수도 있어요."

"뭐가요?"

"제 이상형이세요. 정말이에요."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정말이에요?"

"네"


이윽고 나에 입에서는 뜬금없이 뇌를 거치지 않고 질문이 하나 튀어나왔다.


"사람의 진심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의 눈이요. 그 사람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어요."

"그럼 저는 어때요?"


한 동안, 아니 영원하게 우리는 눈을 맞추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 고요하게 비치는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얼마간의 적막이 흘렀을까. 순간의 시간은 너무나 무한했다. 내 눈을 피하지 않는 그녀를 나는 그렇게 영겁의 시간 동안 바라보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서로의 맥박이 느껴질 정도로.


서로가 삽시간에 사랑에 빠져들었다. 격정적으로 사랑하기도, 때로는 티격태격, 하지만 이내 다시 열렬히 서로에게 충실했다. 12월의 겨울이 막 시작할 때, E와 나는 감당할 수 없는 뜨거운 사랑을 시작했다.


세상 무엇보다 새콤하고, 아찔하고 톡 쏘는 테킬라처럼 우리는 서로의 강력한 이끌림에 사랑을 시작했다. 

그리고 영원할 줄 알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머리가 깨질듯한, 온몸이 저릿한 숙취는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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