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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혜진 작가 Jun 11. 2022

라면 스프가 뭐라고

아이의 사과에 엄마는 언제나 진다

오늘은 아침부터 서둘러 아이 친구들과 수목원 나들이를 했다. 원 밖에서 만나니 더 반갑고 매일 노는 장소도 아니라 신이 나서 몰려다녔다. 3시간 정도 놀고는 집에 오는 길에 늦은 점심을 대충 해결하려 김밥집에 들렀다. 각자 취향에 맞는 김밥을 3줄 사들고 집에 도착했는데 이것만 먹기에는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정말 오랜만에 라면을 하나 끓였다. 아이들이 손을 씻는 사이 후딱 라면 물을 올렸고 배가 고프다고 연신 외치는 아이들의 소리에 얼른 물이 끓기를 기다렸다. 어느새 손도 씻고 옷도 갈아입고는 딸이 옆으로 왔다.



"엄마 라면 끓여? 너무 맛있겠다!! 

나도 같이 해보고 싶어, 이 스프는 내가 넣을 거야! 알겠지?!"



아이가 주방을 구경하는 것도 좋고 과일을 혼자 깍아보겠다며 자신의 뭉툭한 칼을 들고 움직이는 것도 다 좋다. 그건 내가 아이에게 허용해줄 수 있는 범위 내의 것이기에 선뜻해보라고 한다. 주방이 꼭 엄마의 구역은 아니니까 도와주겠다는 마음 반, 내가 해보고 싶은 마음 반. 아이의 생각을 존중한다. 그런데 가스레인지 불 앞에서는 여전히 아이를 방어하는 마음이 단숨에 올라온다. 



지금은 물이 끓고 있고 이제 막 면을 넣었다. 냄비 위로는 뜨거운 공기가 올라오고 있고 냄비는 스치기만 해도 놀랄 만큼 뜨겁다. 아이는 알 리 없는 이 불안한 엄마의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대답도 자제하고 있었다. 머릿속은 반으로 나뉘었고 오늘은 또 어떤 말로 못하게 해야 할까 싶었다. 뜨거운 것이 있을 때는 가스레인지 근처에 오지 못하게 하지만 이제 아이는 7살. 스스로 조심하면서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끓는 무언가는 아직도 내어주지 못했다.



"지금 뜨거운 곳에 넣어야 해서 엄마가 할게."

"아니야, 나 할 수 있어- 해보고 싶어"

"... 그럼 알았어 조심해서 넣어봐"



아이는 엄마의 허락이 떨어지자, 수프를 넣어야 할 냄비를 유심히 쳐다봤다. 피어오르는 김을 보며 자신이 생각해도 뜨거워서 어쩌지 싶었는지 싱크대 서랍에서 비닐장갑을 2개 꺼내왔다. 왜 그걸 끼는지 물어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뜨거운 것을 조금 덜하게 만들겠다는 의지 같았다. 엄마인 나의 눈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쓰레기만 만들어내는 낭비 행동이지만 7살이 생각하기에는 왠지 뿌듯한 방법을 찾은 모습이었다. 그걸 껴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말을 해봐야 잔소리밖에 안되기에  일단 가만히 두었다. 



"어?! 엄마 이거 어쩌지..."



면을 젓고 있는데 풀이 죽은 아이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라면스프가 싱크대에 널브러져 있었다. 비닐장갑이 미끄러운 데다가 어른용이라 자신에게 맞지도 않다. 그리고 수프는 힘 조절을 잘하고 뜯어야 하는데 처음 해보는 일이라 너무 세게 당긴 탓에 스프가 반 이상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잘하고자 한 일인데.. 생각지도 못한 사고가 발생했다.



"하-"

한숨부터 나왔다. 

'이봐 엄마가 한다고 했지? 왜 그렇게 세게 뜯는 거야! 라면 스프 없어서 라면도 버려야겠다. 아효'

아이를 야단치는 말이 목구멍을 차고 올라왔다. 이런 가시 돋친 말을 할 거면 차라리 입을 닫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이 사달이 났고 나는 화가 났지만, 이미 아이는 얼어있기에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은 뱉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부드러운 말투로 말이 나오지도 않으니 그냥 조용히 그 자리를 치웠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아이는 더 긴장했고 엄마의 얼굴을 살폈다.



"나 방에 조용히 가 있을게"



어쩌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엄마가 더 무서웠을지 모르겠다. 야단을 들을 것만 같았는데 대꾸조차 하지 않는 엄마를 보면서 아이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엄마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실망감을 안겨줬다고 자책을 했을지 아니면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 무엇이 되었든 무거운 생각으로 아이는 혼자 방에 갔다.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마무리할 테니까 애한테 가봐"

"아니야 내가 이거 치울 테니까 남편이 가봐"

"엄마를 기다릴 텐데 내가 가면 안 되지"

"나는 아직도 화가 났어. 지금 가면 안아주고 이해하지 못하고 화낼 거야. 

내가 아직 감정이 이런데 애한테 가면 뭐해. 그러니까 남편이 가"



나는 화가 났고 왜 그런지 평소보다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아이의 이 실수가 뭐 그렇게 큰 잘못이라고. 머리로는 이미 결론이 났는데 마음이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아이는 분명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다 아는데... 내 감정도 중요했다. 여전히 아이의 실수에 화가 나 있는데 인심 좋은 척 다 이해하는 척 아이를 달래줄 수가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런 내가 못나 보이고 이 엄마는 뭔가 싶었지만 그래도.. 척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 내가 미안해"

여전히 표정 없는 엄마 옆으로 아이가 먼저 다가왔다. 아이의 사과는 늘 엄마를 이긴다. 7살의 말은 언제나 진심이었고 계산적이지 않아서 짧은 문장으로도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래서 나이 많고 계산적인 엄마는 늘 진다. 어른인 내가 먼저 사과했으면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이었을까 뜨끔하며 그제야 마음이 제자리로 내려앉았다.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하루가 끝난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라면 수프가 모자라서 맛있게 먹지 못한 게 아쉬워서인가? 우스갯소리를 하며 이해해보려고 하지만 그건 아닐 테니까.



"엄마가 그럴 줄 알았어-

실수하면 이제는 한다고 안 하겠지, 나는 하라고 했다?!"

아이에게 그 일을 하라고 허락할 때부터 어쩌면 아이의 실수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잘할 확률보다 못할 확률이 더 큰 일. 위험하다며 말렸던 엄마의 말대로 내가 잘 못하는 걸 안다면 이제 하겠다는 소리를 안 하겠지 싶은 아주 고약한 꿍꿍이가 있었던 건 아닐까. 해보면 엄마 말이 맞다는 걸, 이건 내가 아직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아이가 인정해주길 바랬나 싶기도 하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한 번 해봐."

이렇게 얘기할 때는 아이를 믿어줬어야 했다. 못해도 잘해도 아이에게 맡겼다면 그건 아이 몫인데 이왕이면 잘 해내게 말도 해주고 눈빛으로도 품어줬어야 하는데.. 그 마음을 아이도 느껴서 실수를 한 건 아닐까 이제야 그런 생각을 해본다.



라면스프 하나 때문에 아이는 오늘 눈물을 한 바가지 흘렸다. 먼저 내민 손에 못 이기는 척 잡아주는 엄마 앞에서.. 그제야 엄마를 도와주고 싶었는데 내가 그걸 못해줬다면서 말이다. 여전히 한참 모자란 엄마는 오늘 또 아이에게 미안하고 한없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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