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캔버스와 싸워서 이기세요
"오늘은 눈이 소복하게 쌓인 겨울을 그리고 싶어요~"
그림을 그리러 공방에 들어섰다. 이제는 익숙해진 공간, 앞치마를 하고 정수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따뜻한 커피도 한 잔 챙겨 자리에 앉는다. 오늘은 어떤 그림을 그릴지 참고할 그림을 찾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계절에 따라 즉흥적으로 선택한다. 아니면 공방에 오지 않는 날 미리 골라두기도 한다. 날이 추워진 오늘, 겨울을 그리고 싶어 졌다. 부산이라 눈이 오는 풍경은 보기 어기에 우리에게 겨울 눈은 늘 동경의 대상이다. 잡히지 않는 사진이나 영상으로만 만나보는 신기루 같은 것 말이다.
눈이 수북이 쌓인 자작나무 숲. 그 사잇길에 썰매를 끌고 가는 빨간 옷 꼬마.
하얀 풍경이 외롭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오히려 혼자 가는 아이를 숲이 감싸고 있다는 느낌의 그림.
오늘은 너다!
양 옆에 나란히 서있는 자작나무 기둥과 잔가지를 그리고, 배경을 흐린 하늘로 채운다. 스산함과 차분함, 그 사이를 오가는 분위기를 담고 싶었다. 이제 바닥에 쌓인 눈을 표현해야 하는데 질감이 없는 물감으로 칠하기가 어쩐지 허전하다. 캔버스에 물감을 아무리 많이 바른다고 해도 두께감이 표현되지 않는다는 점이 아쉬웠다. 자고로 눈은 수북하게 쌓여야 맛이 아닌가.
"선생님, 요거 이렇게 수북한 느낌 만들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아~물감에 이거 섞으면 가능해요 잠시만요."
이렇게 해보고 싶다는 말을 하기만 하면 선생님은 뚝딱 내 머릿속의 그것을 실제로 보여준다. 재주가 참 좋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쪽에서 하얀 물감 같은 걸 하나 들고 왔다. '꾸덕이'라고 하는 귀여운 이름의 무언가를 말이다.
물감에 꾸덕이를 섞었더니 말 그대로 물감이 꾸덕해졌다. 보기에는 생크림 같았고, 나이프로 섞는 과정은 부드러웠다. 분리되어 있는 2가지를 살살 달래 가며 섞었다. 한 스푼 가득 떠 캔버스에 올려보니 내가 원하던 그림이 나왔다. 수북하고 두께감 있는 폭신한 눈. 빨간 망토 아이가 넘어져도 다치치 않을 만큼 보드라운 눈.
이제야 완성이다.
빈 캔버스에 물감을 가득 채우고 나서 느끼는 희열이 있다. 잘 그리고 못 그리고의 판별을 떠나 내가 이걸 해냈구나 싶은 마음까지도 든다. 빈 페이지에 내 이야기를 가득 쏟아내고 난 뒤에 느끼는 시원함, 뿌듯함, 성취감.. 이런 감정들처럼 말이다. 그려낸 결과물이 물론 내 마음에 안 들 때가 많다. 참고한 사진은 이렇게 잘했는데-분명히 똑같이 한다고 했는데 왜 다를까- 경력의 차이임을 알기에 나를 다그치지 않고 그저 오늘도 했음에 의미를 부여한다.
'빈 캔버스와 싸워서 이기세요'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순간 이게 무슨 비장한 응원인가 싶었는데, 이제야 알겠다. 빈 캔버스는 외로운 싸움이라는 것을. 그림을 그려내는 일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기 때문에 하기 싫어도, 나의 밑천이 보여도 끝내 채워야 내야 한다. 혼자만의 싸움에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야 이기는 게임. 인생도 그림도 그런 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