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브런치에 중독됐습니다. 한 달 전에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지웠거든요. 업무 중에도 뉴스피드를 1분에 한번 꼴로 새로고침하는 제 모습이 웃겼습니다. 새로운 내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봤던 사진을 또 보고 또 봤습니다. 저는 지금 에콰도르에서 6개월짜리 인턴을 하고 있습니다. 해외생활이 부단히 외로우니 주변 사람들의 소식을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인스타에 중독된 거죠. 헌데 SNS 총량은 변하지 않는 건지, 인스타와 페이스북의 대체재로 브런치를 택하게 됐습니다.
업무시간에 스페인어로 된 문서를 보다가 집중력이 떨어지면 곧바로 브런치에 들어갔습니다. 구독하는 작가님들의 피드를 수시로 확인하고, 브런치가 추천하는 글은 무조건 다 읽었습니다. 분명 5분 전에 피드를 확인했는데 또 피드를 누르곤 했습니다. 플랫폼만 바뀌었지 분명 어디서 많이 본 광경이었습니다.
이 중독에는 긍정적인 영향이 분명 있었습니다. 빠르게 피드를 넘기는 다른 SNS와 다르게 브런치에서는 글 하나하나를 정독했습니다. 훌륭한 작가님들, 닮고 싶은 문체를 보며 많은 자극을 받았습니다. 특히 위클리 매거진에는 정말 좋은 글들이 많았습니다. 브런치가 아니었으면 일과 가정의 균형을 지키는 모던 파더가 되겠다는 꿈은 생각도 못했을 겁니다. 해외 취업에 성공한 분들의 수기를 읽으며 지금 제 삶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수시로 돌아보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부정적인 영향도 많았습니다. 저는 에콰도르에 인턴십을 하러 왔지만 업무 시간에도 브런치를 지나치게 많이 보곤 했습니다. 직원들과 소통이 쉽지 않아 그 외로움을 브런치로 달랬던 걸까요. 현실을 돌파하자니 두려워서 숨어버리는 수단이 되어버린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어떤 글을 쓸까, 글감에 대한 고민으로 업무에 집중하지 못한 적도 많습니다.
퇴근 후에는 어땠을까요? 업무 중에는 스페인어를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자극을 많이 받습니다. 상사와 대화 한마디 할 때마다, 누군가 말을 걸 때마다, 대화를 더 이어가지 못하곤 하거든요. 프로젝트 문서를 읽을 때도 엄청난 시간이 걸립니다. 해석이 잘 안 될 때는 자괴감에 바닥을 발로 꽝, 꽝 차 버렸습니다. 이런 한계를 절실하게 느끼면서 내일은 조금 더 업무 효율을 높이고 직원들과 친해지기 위해 꼭 스페인어에 몰두해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그런데 집에 오면 그 다짐은 싹 잊어버리고 노트북부터 열게 됩니다. 하루 종일 생각한 글감을 브런치에 옮기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글을 너무 쓰고 싶어서, 글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나의 즐거운 혹은 외로운 마음을 글로 나누고 싶어서 워드를 열었습니다. 남미에서의 인턴십 경험이 흔하지는 않잖아요? 정작 글을 쓰려고 하면 대부분은 글감이 이어지지 않아서 포기했지만요. 그렇게 한두 시간가량을 낭비합니다. 글을 썼다가, 지웠다, 썼다가, 지웠다, 다른 작가님들의 글을 읽고는 이 문체를 시도해 볼까, 저 문체를 시도해 볼까..
그러면 다음날 회사에서 어떤 마음이 들까요? 직원들과의 대화가 깊어지지 않는 제 모습, 어제 공부한 단어를 그새 까먹어 다시 사전을 찾아야 하는 제 모습을 보며 끝없는 자괴감이 들었죠. 좋은 글 하나 써보려고 분투하던 그 시간에 차라리 스페인어나 공부할 걸.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글쓰기에 몰두할 때가 아닙니다. 언어에, 현지 생활에, 업무에 적응하느라 한창 바빠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좋은 글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다는 마음은 그 어느 때 보다 강하니 문제입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바람의 나라’에 빠져 고삼 1달을 통째로 날려버렸던 2010년 8월과 같은 느낌이랄까요.
저는 글이 정말 쓰고 싶습니다. 그러나 브런치 작가라는 타이틀은 동시에 저의 한계를 보게 합니다. 지금까지 91편의 글을 쓰면서 일상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 단편적인 글을 쓰는 것에는 자신감이 붙었습니다. 허나 일정한 흐름을 가진 글, 뚜렷한 주관을 가진 메시지 있는 글을 쓰는 것은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브런치 작가가 되고 1년이 지나니 자연스레 욕심이 생겼습니다.
오랫동안 글감을 모아서 좀 더 완성도 있는 긴 호흡의 글을 쓰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잠시 글 쓰는 일을 미뤄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제가 몰두해야 할 일은 글쓰기가 아닌 본업이기 때문입니다. 인턴십이 끝나는 8월쯤이 되면 그동안 최선을 다해 살아온 일상을 엮어 좀 더 괜찮은 글을 써볼 수 있지 않을까요? 브런치에 글을 발행하는 행위는 제게 취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정말 좋아하는 이 일을 멈추는 건 쉽지 않지만, 결정을 하게 된 데에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한비야 씨(비야 누나!) 책의 영향이 컸습니다.
내게 장작 열 개와 아궁이에 걸린 솥 열 개가 있다 치자. 그 열 개의 장작을 한 아궁이에 한 개씩 넣는다면 열 개의 솥을 미지근하게 만들 뿐이다. 그러나 가지고 있는 장작을 한 아궁이에 몽땅 몰아넣는다면 그 아궁이의 솥은 확실히 달궈질 것이고 물이 끓을 것이고 밥이 되고 누룽지가 누를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그 한 가지 일에 있는 힘과 시간과 노력을 몰아주어야 뭐가 돼도 된다는 말이다. 그럼 다른 아궁이는? 그건 할 수 없다. 모든 일을 다 잘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는 거니까.
한비야 <1그램의 용기>
저는 제가 가진 장작들을 인턴십이 끝날 때까지 모조리 스페인어와 업무에 몰아볼 생각입니다. 이 아궁이가 활활 타올랐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오고 싶었던 남미에 다시 왔고, 그토록 꿈꾸던 일을 하고 있으니까요. 꿈에 비해 현실은 녹녹하지 않지만, 현실 도피에 글쓰기를 이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글을 쓰는 일은 잠시 뒤로 미루겠습니다.
일기장에 남겨도 될 이야기를 굳이 구독자님들께 발행하는 이유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제가 또다시 좋은 글을 쓰고 싶어 여기저기 기웃거릴 거라는 걸 잘 알기에 그렇습니다. 브런치에 글을 발행하고자 낭비하는 시간을 멈추겠다는 것이지 브런치를 끊겠다는 건 아닙니다. 이것마저 없다면 저는 무슨 낙으로 남미 생활을 버티겠습니까. 계속해서 다른 작가분들과 소통하며 많이 배울 생각입니다. (가끔 좋은 글감이 불현듯 스치면 조용히 글을 올릴지도 모르죠. 하하. 이것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세요.) 아무쪼록, 더 발전한 모습으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글 한 편당, 딱 1그램씩 성장하는 작가이고 싶습니다. 1000편을 써서 1000명의 구독자를 얻고 1kg 성장할 때까지 쓰고 또 쓰는 사람, 이원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