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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Jul 17. 2019

여행이 지겨워졌다.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 프롤로그

당분간 여행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일 년간 중남미를 떠돌며 내가 생각보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브런치 글 80%가 여행 얘기면서 웬 헛소리냐, 하실 텐데 그땐 그랬다. 다음 여행지의 계획을 세우는 일이 더 이상 설레지 않았다. 외국인과 대화하는 일이 귀찮아졌다. 익숙하고 편안한 사람들이 그리웠다. 여행 중에도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더 잘 여행하고 있지 않나 계속 비교했다. 그들이 가는 맛집에 나도 가고, 그들이 돈을 아꼈다는 방법을 나도 따라 하고.


돌이켜보면 그 지겨운 비교가 여행 매너리즘에 빠지게 했다. 어딜 가도 비슷하겠지. 나 또한 “제가 어디 어딜 갔었는데 거기가 훨씬 좋아요!” 따위의 말을 늘어놓는 여행 꼰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비교, 잘난 척, 그 오만함이 지겨웠다. 한국에 돌아가거든 당분간 나오지 말자, 커리어 잘 쌓고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해야지, 이제 정착이라는 걸 좀 해보자고 생각했다.

Estella, Spain



반년 간의 취업준비 끝에 취직을 했다.

한 달 조금 넘는 여유 시간이 생겼다. 빚을 내서라도 여행을 다녀와라, 일 시작하면 장기간 여행은 꿈도 못 꾼다, 모두 똑같은 말을 했다. 여행이 지겨워졌다고 했지만 한국에 남아있기에는 시간이 아까웠다. 여가 시간마저 효율적으로 쓰고 싶어 하는 이 습성! 집약적인 성장으로 성실과 효율이 몸에 밴 동북아시아인은 항공권을 검색했다.


유럽여행을 할까, 돈이 없구나. 저렴하게 일본이나 동남아를 가볼까. 아니야 거긴 언제든 갈 수 있어. 인도는 어때? 쿠바에 두 달 살았으면 됐지 인도는 또 왜.

이런저런 현실 여건들을 다 배제하고 정말 가고 싶은 곳을 생각했다. 스페인 순례길이었다. 예전부터 꿈은 꿨지만 ‘언제 가보려나~’ 하고 말았던 그곳.


돈이 없었다. 임시로 하고 있던 패스트푸드 알바를 좀 더 빡세게 돌렸다. 꽤 오른 최저시급과 마지막 부모님 찬스를 생각하면 얼추 경비는 될 것 같았다.

문제는 마음이었다. 한국에 있기 아까운 시간이라지만 해외여행은 귀찮은 걸. 언제 또 계획 세우고 앉아있나. 등산화, 스틱, 침낭, 가격비교 언제 다 해서 준비할래? 걸을 때 배낭이 제일 중요한데 내 배낭은 허리 벨트가 터져서 제대로 고정도 안 되잖아. 새로 사야 할까? 등산화는 최소 2주 신어서 길들여 놓으라던데 이제 사서 어떡할라고? 순례길에 베드 버그가 그렇게 끔찍하다던데. 피부도 새까맣게 타지 않을까? 돌아오면 바로 연수 시작인 건 또 어떻고. 악. 복잡해.

Castildelgado, Spain

‘답이 없는 어려운 문제는 맨 끝으로 미룬다.’

내 삶의 중요 원칙 중 하나다. 그렇게 아무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시간은 흘렀다. 누가 뭐 할 거냐고 물으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거야! 근데 좀 귀찮아. 제주도 올레길이나 걸을까?

했다.


출발 삼 일 전, 비행기 표를 샀다. 고민하는 한 달 사이에 10만 원이 올라있었다.

출발 이틀 전, 아웃렛에서 선글라스와 등산화를 샀다. 저렴한 데다 방수도 된다고 했다.

출발 하루 전, 파리에서 바욘으로 넘어가는 기차표를 샀다. 보통 40유로 내외로 사던데 직전이라 123유로가 들었다.


모든 준비는 마쳤다. 계획은 없다. 평균 35일가량 걸어서 이 길을 완주한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15일. 지식in 검색하니 중간에 지루한 구간을 건너뛰어 하루 평균 38km씩 걷는 2주짜리 코스를 누군가 짜 놓았다. 그래, 난 이대로 간다. 출발!

그때는 매일 38km가 가능할 줄 알았다. 군대에서 40km 행군도 했는데 뭐.


결론부터 말하면 이번 여행도 망했다. 계획은 없었지만 그나마 있던 계획마저 어그러졌다. 애초 목표했던 산티아고 도달은 당연히 실패했다. 스페인의 태양은 강렬했고 나의 다리는 약했다. 안 그래도 짧은 일정 중 대상포진에 걸려 하루를 쉬어야 했다. 사람들과의 이별은 여전히 낯설었다.


그럼에도 이 망한 여행은 28 인생 최고의 여행이 되었다. 어디서 잘지, 뭘 먹을지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계획 세우기 싫어하는 나에게 딱 좋았다. 황량한 들판을 걸으며 온전히 자연을 느끼는 것은 언제나 꿈꾸던 낭만이었다. 걷고 싶은 만큼 걷고 쉬고 싶을 때 쉬면 됐다. 함께 걷고 싶을 땐 같이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면 되었고, 혼자일 때는 묵묵히 생각을 정리했다.

Estella, Spain

정답도, 모범 답안도 없는 여행! 그 누구와 비교할 필요도 없으며, 서툴더라도 마음이 동하는 대로 자기만의 길을 만들어 가면 되는 여행! 순례길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길을 걸으며 비교와 잘난 척과 오만함도 조금씩 깨졌다. 여전히 여행에 설렐 수 있음을 알게 됐다. 비교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고 각자의 순례길을 홀로 또 함께 만들어가는 멋진 사람들을 만난 덕분이다.




여행기라는 게 쓸수록 부담이 생긴다. 누구든 마음먹으면 여행을 떠날 수 있고 그런 스토리들이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시대에서 내 글이 돋보이려면 무슨 이야기를 그려야 할까. 이런 고민은 결국 작가가 새로운 글을 쓰지 못하게 막아버린다. 돋보여서 뭐하누. 그냥 2019년 어느 날들을 글의 형태로 남겨두는 것, 딱 그 정도면 되겠지 싶은 마음이 찼다. 마음이 찼으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하면 된다.


2019년 6월 11일부터 27일까지의 기록.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순례길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한다.

Buen Camin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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