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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Jan 10. 2018

지도교수 면담2

(진짜로) 학부 마지막 지도교수 면담을 했습니다. 졸업을 위해 의무로 해야하더군요. 사전에 면담지를 작성 해 가야 합니다.  면담지에는 '진로현황 및 계획'을 적는 칸이 있습니다. 해당 건에 체크를 해야 합니다.

확정, 응시중, 준비중, 미취업, 기타.

삼색펜의 검정 촉을 누름과 동시에 머리를 빠르게 굴렸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지? 취업을 준비중 이라 해야하나? 명확히 진로를 정하지 않았는데. 기타인가? 아니, 결국 하반기 취업을 안했으니 미취업인가?

조금 더 밑에 보면 '시험 준비' 칸이 있었습니다.

행정고시, 기술고시, 변리사, 기타, 해당 없음.

고민할 여지 없이 해당 없음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진로 계획을 구체적으로 적는 칸이 있습니다.
'중남미 진출을 위해 스페인어를 공부하며.. 주저리..' 이런 얘기를 적었습니다.

교수님과 면담은 10분이 채 안걸렸습니다. ODA니, 기술 협력의 필요성이니, 개발도상국이니,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더니 거 참 신기한 학생 만났구만 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제 얘기를 들음과 동시에 키보드로 무언가를 타이핑 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의 계획은 없는건가요?"
"네. 지금으로서는 그렇네요."
"조언을 구할 사람은 있나요? 좀 생소한 분야인데."
"네. 처음부터 혼자 해야 할 것 같아요. 힘들겠지만 전 이런게 더 좋아요."
"그래요. 쉽지 않아 보이는데. 잘 해봐요. 여기 서명 했으니, 밑에 특이사항란은 알아서 작성 해서 내세요."

저의 7년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미취업'에 '해당 없음' 이죠. 뭐 종이쪼가리 하나 가지고 그러냐, 하실테지만 뭐랄까. 난 무얼 위해 20대 초중반을 살았나, 잠시 의심은 되더이다.

이 세상은 나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 이야기로 회사의 직무를, 그 성적(성실함과 비례한다고 여겨지는)으로 대학원의 빡센 일과를 잘 해낼지, 기업이 원하는 결과를 창출해 낼 수 있을지에 관심을 가집니다. 뻥쟁이가 되어야 취직을 할 수 있는 세상인거에요.

근데, 제가 슬펐던건, 이런 사회에서 대학교가 우리 학생들에게 최후의 보루가 되어주지 못했다는겁니다. 공학 교육의 혁신을 위해 도입했다는 ABEEK은, 누굴 위한 에이빅인가요. 학생들의 최종 진로를 칼로 무 자르듯 딱 잘라서 통계를 내고, 그 취업률 통계로 우리 대학 우리 학과의 우수성을 알리는건가요? 이렇게 하면, 공학 교육이 혁신이 되고, 요즘 그렇게들 좋아하는 4차 산업혁명에 맞는 인재가 육성되는건가요?

학교를 떠나는 마당에서 피해자 코스프레는 이쯤에서 그만 하지요. 감사하게도, 그 진로 현황지와 교수님의 면담이 저를 설레게 했습니다. 낭만이나 꿈을 갖는 것은 한량들이나 하는 사치가 되어버린 세대의 대학생으로 살아가면서, 내가 잘못된건가 세상이 잘못된건가 늘 궁금했거든요. 면담을 하고 나니,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이상을 갖고 조금씩 변화를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어보자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류의 다짐은, 늘 그랬듯 제 가슴을 뛰게합니다. 타의에 의해 움직이는 인생에서 벗어나 '나의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넘어지고, 까지고, 만신창이가 될 수도 있겠네요. 휴.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끝까지 가봐야겠습니다. 고작 '미취업'에 '기타' 일지라도, 아직은 '기타'에 속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줄 세상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해보렵니다. 제가 자녀를 낳아 키울 때 쯤은, 대학교와 젊은이들도 다시 낭만을 찾은 세상이 되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만들어 갈 거구요. 물론 저도, 40, 50살 먹고서도 낭만을 사는게 철이 없다며 손가락질 받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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