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이었다. 눈이 내린 채로 땅이 얼어버려 미끄러웠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고3 과외돌이의 집이 버스로 5분, 자전거로 15분 거리에 있었다. 실력이 변변치 않았지만 교통비 나가는 게 아까워서 자전거를 탔다. 과외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체인이 빠져버렸다. 자전거에는 문외한이었는데, 검색하려고 보니 그날따라 핸드폰 배터리도 이미 나간 상태였다. 이대로 집까지 끌고 가기에는 30분이 넘는 거리였기에 어떻게든 자전거를 고치고 싶었다. 칼바람을 맞은 자전거 체인은 손가락도 얼려버릴 만큼 차가웠다. 10분째 이것저것 다 시도하니 손과 옷에 기름때가 범벅이 되었지만 체인은 제 자리를 찾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빨간 야상을 입고 있던 나는 빨간 자전거와 함께 칼바람을 맞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머릿속을 비운 채로.
그때, 지나가던 젊은 남자분이 약간 머뭇거리며 다가오셨다.
“저.. 도와드릴까요?”
“아, 감사합니다. 지금 자전거 체인이 빠졌는데.. 어떻게 해야 다시 굴러갈지 모르겠어요.”
“잠시만요. 저도 자전거를 탈 줄 몰라서요. 제가 검색해 볼게요.”
검색창에 “자전거 체인”을 검색하시더니, 거기 나와 있는 대로 직접 자전거를 만져 보셨다.
“손에 기름때 묻을 텐데.. 제가 할게요.”
“아니에요. 집이 가까워서 씻으면 그만이에요. 찾아보니까 페달을 뒤쪽으로 돌려보라네요? 제가 여기 잡고 있을 테니까, 뒤로 굴려보시겠어요?”
“네네. 해볼게요.”
그렇게 자전거 체인은 제 자리를 찾았고, 고장 난 줄만 알았던 자전거는 칼바람을 뚫고 쌩쌩하게 굴러갈 수 있었다. 쉽게 굴러가는 자전거를 타고, 세상 다 가진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그 남자분께 연신 꾸벅꾸벅, “감사합니다!!”를 연발하고는 집에 갔던 기억이 난다. 글을 쓰며 그 순간을 상상하니 다시 행복해진다.
이게 벌써 2년이 다 되어간다. 도움을 받은 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도움을 주며 살아가고 싶다고 다짐을 했지만 빡빡한 일상은 좀처럼 다른 사람들을 돌볼 만큼의 여유를 허락해 주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것도 핑계였을지 모르겠다. 화요일 아침 8시, 학교에 가기 위해 파란색 간선버스에 탔다. 이 시간의 505번 버스는 지옥이다. 버스가 구로디지털단지역에 다다를 때 즈음이면 발 디딜 틈이 없고, 손 하나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이 꽉 들어찬다. 역을 두 정거장 정도 남겨두었을 때 즘, 옆에 있던 남자분이 사람들을 뚫고 하차하는 곳으로 가려다가 그만 손에서 지갑을 놓쳐버렸다. 지갑은 그대로 날아가 자리에 앉아있던분의 자석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옆에 서 있었는데, 지갑에서 카드 하나가 분리돼서 따로 날아가는 것을 봤다. 좌석에 앉아계셨던 분이 지갑을 주워주셨다. 하차를 하시려는데, 카드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셨다. 급박한 목소리로 “어? 카드가 없어졌는데..”라고 하셨지만, 버스 안에 누구도 동요하지 않았다. 카드를 찾으려면 그 주변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움직여야 하고,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자리에 앉아계셨던 분들도 남자분의 절박함과 다르게, 스마트폰을 보거나 아예 요동을 하지 않았다.
나는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으나, 갑자기 그 추운 겨울날, 얼음판 위에서 자전거가 고장 나 발을 동동 구르던 기억이 났다. 먼저 핸드폰 손전등을 켜고 바닥을 꼼꼼하게 살폈다. 카드를 잃어버리신 분이 앉아있는 승객들의 발 밑을 찾는 동안 시야가 잘 보일 수 있도록 손전등을 비추어드렸다. 이미 내려야 할 정거정은 지나쳤지만, 카드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자리에 앉아 계셨던 어르신이 하차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의자 안쪽에서 카드를 찾을 수 있었다.
정신 차리고 생각해보니, 나 역시 방관자일 때가 훨씬 많았다. 누군가의 선행을 지켜보며 우와, 멋있다고 생각하는 게 고작이었다. 세상을 살아가며 크든 작든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만큼 베풀지는 못한 것이다. 내가 지금 이거 한다고, 세상이 크게 바뀌겠어? 고작 작은 도움 준다고 이걸 누가 인정해 주겠어? 이런 심보가 없지 않아 있었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갈 때는 그랬다. 하지만, 내 자전거를 고치는데 도움을 주셨던 그분은 뭐 대단한 걸로 나를 도와주신 게 아니었다. 그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고도 무시하지 않는 그 착한 심성을 소유한 분이었을 거고, 자전거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스마트폰을 검색 해 가며 도움을 줄 수 있는 작은 여유를 가진 분이었을 거다.
세상이 이런 ‘작은 영웅’들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 나부터도, 세상의 부조리를 보며 가슴치고 안타까워하는 만큼, 먼저는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없는지 둘러보는 작은 여유를 소유한 사람이 되어야겠다. 505번 버스 안에서 한 일은 정말 사소한 선행이었다. 착한 일 했다고 말하기 부끄러울 만큼. 그런데 작게나마 해보니 첫 번째가 어렵지, 두 번째 세 번째는 자신 있게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