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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Mar 26. 2017

#9 봄의 도시에 비가 내리면

콜롬비아 메데진 (Medellin)

미녀로 유명한 나라 콜롬비아, 그중에서도 미녀로 유명한 도시 메데진. 메데진의 별명은 '봄의 도시'이다. 일 년 내내 봄과 같은 날씨가 계속되고, 봄과 같은 미녀들이 많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2016년 1월 3일

신기한 재능

메데진에서의 둘째 날, 고대하던 엘뻬뇰에 가기로 했다. 호스텔 테라스에 앉아 있던 동양계 미국인 앤디에게 물었다. "오늘 어디가?"

"음.. 싼 안토니오에 가서 박물관을.. 어쩌고 저쩌고.."

딱 봐도 별 계획이 없어 보이길래 "엘 뻬뇰이라는 멋진 곳이 있는데 같이 갈래?"라고 하니까 구글링을 해보더니 바로 오케이 한다. 그런데 이 친구, 참 특별한 재능이 있다. 말을 걸기 싫게 만든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나 : 와, 이 콜롬비아 탄산음료 나쁘지 않네. (Not bad)

앤디 : 근데 별로 좋지도 않아. (But not good)


나 : 메데진은 1년 내내 봄 날씨여서 별명이 봄의 도시래.

앤디 : 근데 어제는 비 왔는데..?

(봄엔 비 안 오니..)


나 : 미국인들하고 대화할 땐 괜히 문법에 더 신경 써서 그런지 말이 잘 안 나오더라고.

앤디 : 아닐걸? 걔넨 그런 거 신경 안 쓸 텐데.

(누가 그걸 몰라서 말했니..)


앤디 : 시티은행이 좋아?

나 : 응. 수수료도 적고 콜롬비아 어딜 가나 있어서 편해.

앤디 : 어디에나 있다고? 그럼 막 시골 촌구석까지 있다는 거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난 원래 사람들하고 있을 때 먼저 말을 거는 편인데 이 친구와는 대화가 쉽지 않았다. 반면교사 삼기로 했다. 나도 누군가랑 대화할 때 충고랍시고 저런 식의 언행을 하고 있진 않은지 돌아봐야지.

엘 뻬뇰 가는 버스는 생각보다 작고 비좁다. 이 버스에 타자마자 앤디가 하는 말, "와! 공짜 사우나다. 게다가 냄새도 죽이는데?" 뭐 나는 아무 냄새도 안 나는구먼.. 아무튼, 주말 메데진 시내의 트래픽은 엄청났다. 도로를 크게 확장하지 않아서인지 차들이 한 길로만 다니는 구간이 많은데 주말이라 너도 나도 가족 나들이를 가나 보다. 2시간이 채 안 걸리는 거리를 3시간 반 걸려서 도착했다.


거대한 바위 엘 뻬뇰은 바위와 함께 그 위에서 내려다본 인공호수가 무척 아름답다. 누군가 연말에 한 포스팅에서 입장료가 $12,000 (약 4,800원)라고 했는데 새해맞이 기념인지 $15,000이나 받았다. 엘 뻬뇰은 계단이 엄청 높다. 이걸 다 올라야 장관을 볼 수 있다. 조금 올라가니 슬슬 호수의 윤곽이 보인다. 올라가는 내내 그 밉던 앤디의 입에서도 '멋지다!'는 말이 떠나질 않는다. 정상에 도착해서 돌아다니는데 현지인들이 자꾸 사진 찍자고 다가온다. 동양 남자가 신기하게 생겼나 보다. 연예인 병 걸릴 듯하다.

이 지역 특산물인 송어 (뜨루챠) 요리. 엘뻬뇰을 힘겹게 오르내리고 먹으면 꿀 맛이다.

돌아가는 버스를 분명 6:45로 예약 해 놓았는데 45분, 50분.. 두 대가 왔으나 둘 다 우리 버스가 아니란다. 7시쯤 도착한 '디스코 버스'로 사람들이 마구 달려간다.

"메데진 가는 버스 맞아요?"

"네! 타세요."

엘 뻬뇰에서 메데진으로 돌아가는 길에 타볼 수 있는 이색 버스. 공식 명칭을 모르겠으니 디스코 버스라고 하겠다. 설마설마했는데 이 디스코버스를 타게 될 줄이야. 물론 버스 자체는 일반 버스보다 불편하다. 이 버스의 특징은 1. 좌석 배치와 차의 외형이 마치 놀이공원의 코끼리열차와 닮았다. 2. 가는 내내 디스코, 살사 등 여러 음악을 쉴 새 없이 틀어준다. 출발하자마자 사람들이 "뮤지카!" (음악 틀어주세요!)를 외쳤다. 잠시 뒤, 흥겨운 라틴 음악들이 흘러나왔다. 약간 트로트 느낌도 났다. 조금은 불편했지만 어쨌든 낭만적인 4시간이었다. 돌아오는 내내 잠이 오지 않아서 (절대 편히 잘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깊은 생각에 빠졌다. 특히 차의 옆면이 뚫려있어서 그런가 군인 시절 혹한기 훈련 마치고 두돈반 타고 돌아오던 시절이 생각났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메데진의 밤 풍경. 낮에 보면 그냥 '붉은 벽돌로 된 건물이 많네' 싶지만, 밤에는 마치 노란 별들이 촘촘히 박힌 듯 각 건물은 낮은 하늘을 수놓는 조명이 된다.

그리고 메데진에 도착하니 오후 11시. 메트로가 끊겼다. 택시를 타고 돌아왔다. 비가 꽤 내렸다. 비 오는 메데진은 아름답다. 봄의 도시에 비가 오니 봄비구나. 비 오는 날이면 내 방 창문에서는 여지없이 스테인리스 판을 맞으며 뚝뚝뚝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린다. 이 소리를 들으면 유독 행복감을 느끼며 잠이 잘 오곤 했다. 동일한 소리가 이곳, 메데진에서 들린다. 좋다. 이 느낌, 이 감정을 잘 간직하고 싶다. 지구 반대편 남아메리카 어딘가에서 내 방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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