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건반을 켰는데 고장이 났다. 백건 하나를 누르면 십여 개의 음이 동시에 울린다. 십 년이 다 된 악기가 장마철의 꿉꿉함을 끝내 버텨내지 못하고 가버렸다.
스무 살 때, 피아노가 미친 듯이 배우고 싶었다. 아는 거라고는 어렸을 때 1-2년 배워둔 덕분에 남아있는 약간의 음감이 전부였다. 책상 위에 A4용지 여러 장을 반으로 접어 길게 늘여놓고 그 위에 건반을 그려 손가락 연습을 했다. 얼마 뒤, 학생회관 4층에 피아노가 비치된 합창실을 발견했다. 그곳은 미리 예약만 하면 누구나 쓸 수 있었다. 거기서부터 피아노 연습이 시작됐다.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지인들로부터 화성, 손가락, 코드 보는 법을 다시 배웠다. 어깨너머로 주법들을 하나둘 익히며, C 코드, G코드의 쉬운 곡부터 연습을 했다. 하루빨리 D코드도, A코드도 익히고 싶었다. #이 하나씩 늘어갈 때 주는 쾌감은 정말 컸다. 그 마음으로 한 달 치 아르바이트 월급을 모두 털어서 첫 디지털피아노를 샀다. 피아노와 함께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학생회관 앞에서 동아리 사람들과 피아노를 치며 노방 찬양을 하고, 거처를 옮길 때마다 피아노도 같이 옮겨 다녔다.
피아노를 조금 더 깊게 연습할 수 있었던 건 군대 시절이었다. 운이 좋게도 군대 찬양팀에는 반주할 사람이 늘 필요했고, 섬기는 마음만 있다면 실력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반주자가 출타를 나가면 대타를 하면서 조금씩 실력을 키웠다. 덕분에 전역 후에는 찬양팀에서 정식으로 반주를 할 수 있었다.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을 때,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피아노를 켰다. 헤드셋을 연결하고 소리를 최대로 맞춘 채 아무 곡이나 연주했다. 질려서 더 이상 치기 싫을 때까지 그랬다. 그런다고 생각이 정리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머리를 비울 수는 있었다. 그렇게 10년을 함께해 온 야마하 P90이 고장이 났다. 피아노가 생명을 다한 것이 꼭 나의 20대가 흘러간 것 마냥 느껴졌다.
스무 살 때 피아노를 너무 배우고 싶었던 그 마음은 이제 다해서 언제부턴가 피아노를 예전만큼 치지 않게 되었다. 야마하 P90은 무언가에 빠져 몰두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느끼게 해 준 물건이었다. 나는 여전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피아노를 켰는데, 먼지 쌓인 피아노는 제 기능을 다하여 이제는 네가 알아서 몰두할 것을 찾아보라고 한다.
흐르는 빗소리 사이로 어디선가 건반을 튕기는 소리, 페달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