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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Apr 08. 2017

#15 멀고 험한 마추픽추

페루 - 쿠스코(Cuzco)

아침 일찍, 볼리비아 비자를 받기 위해 인터넷 카페에 가서 비자를 신청, 출력했다. 남미 카톡방에서 알게 된 정희와 같이 대사관으로 갔다. 오가는 길에 날씨가 계속 바뀌었다. 아침에는 쌀쌀했는데 대사관에 도착하니 무지 더웠고, 비자를 받고 나오니 비가 쏟아졌다.


2016년 1월 18일

제 사진의 모델이 되어주세요.

비자를 발급받고 나서 정희랑 둘이 산 안토니오 시장에 갔다. 가는 길에 흥겨운 축제가 벌어지는 줄 알았는데 원주민들이 시위 비슷한 걸 하는 중이라고 했다.

옆구리에 달린 저 야마, 실제 야마를 박제 한건지 그냥 인형인지 궁금해 죽겠다.

광장 앞을 지나는데 갑자기 현지인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제가 사진작가인데요. 아시아 사람들을 모델로 사진을 좀 찍고 싶은데, 시간 괜찮으세요?"

새로운 강도 수법인가? 우리 둘은 엄청나게 경계했다. 그런데 인상이 꽤 선하다. 속는 셈 치고 내가 정희의 짐을 완전 마크한 후 정희가 이 친구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알렉스라는 이 친구는 알고 보니 정말 아마추어 사진작가였다. 페이스북 페이지도 운영한다. 페루에 놀러 온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사람들을 모델로 찍은 사진들이 인상적이었다.

사진 찍는 폼과 그 결과물을 보고 만족한 우리는 곧 경계심을 풀었다. 그리고 알렉스도 우리와 하루 종일 동행하며 즉석 사진 강의를 해 주었다. 고향이 페루의 수도 리마라는 알렉스. 평소에 너무나도 묻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이 지역 사람들은 고산병에 적응하는 유전자를 타고 나는 걸까?

"리마는 저지대지?"

"응."

"쿠스코는 고지대고?"

"응."

"그럼 쿠스코에 있으면 너도 숨이 차니?"

"하하. 처음 올 땐 답답함이 느껴지긴 하더라."


내 사진 실력은 아직도 형편없지만, 알렉스 덕분에 많은 것을 배웠다. 군대에서 2년 모은 월급으로 전역하자마자 DSLR을 샀지만 쓰는 법을 몰랐다. 2학년 때 사진 예술의 이해라는 수업에서 조리개와 셔터 속도, ISO 등 기본적인 것을 처음 배우고는 신나서 사진을 찍으러 다녔었다. 사진 찍는 기술보다는 감상하는 예술로서의 사진에 더 관심이 갔다. 그래서인지 이 전에 찍은 사진들은 수평도 하나도 안 맞다. 사진을 보고 그 시절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떠올리면 그만이지 기술이 뭐가 필요 하담? 그러나 이런 내 생각이 알렉스를 만나고 깨졌다. 수평선을 활용해라, 흑백도 멋있다, 피사체를 3/1에 위치시켜라 이런 간단한 팁들이었지만 알고 나니 확실히 사진이 더 재밌어졌다.

 

심령사진 찍는 법도 알려줬다.

시답잖은 이야기도 많이 했는데 이 친구 크리스천이다. 일본의 어느 다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살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시아 지역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그 다리에 가서 자살하지 말라고, 포옹해 주는 그런 일을 해 보고 싶단다. 어려서부터 직접 돈을 모아 카메라를 장만하고 사진을 독학했다는 알렉스.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보는 게 이런 기분일까? 늘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알렉스를 보며 또 한 가지 배웠다.


호스텔에 돌아오니 룸메이트가 한국분으로 바뀌었다. 스물아홉 살 정우형, 그리고 정우형과 함께 리마에서 온 강이형. (이 형은 나중에 내 남미 여행 최고의 동행이 된다. 기대하셔도 좋다.) 언제 마추픽추에 가려나 재고 있었는데, 마침 정우형이 내일 가신다길래 따라가기로 했다.


1월 19일

마추픽추는 어디에?

사실 마추픽추는 여행사를 끼고 가는 게 가장 편하고 저렴하다. (한국인은 파비앙!) 그런데 이번 마추픽추 행은 조금 특별했다. 듬직한 형 같은 성격을 가진 정우형을 나는 완전히 신뢰했고, 그래서 형이 하자는 대로 여행사를 끼지 않고 직접 마추픽추까지 가보기로 했다. 가는 길까지 우여곡절이 많았기에 더 기억에 남는 마추픽추 행!


시작은 좋았다. 아침 일찍 ATM에서 돈 뽑고 (Banco de la nacion. 수수료 없는 듯!) 마추픽추+몬타냐의 입장권을 샀다. 보통은 마추픽추+와이나픽추를 많이 하는데 와이나픽추는 하루 입장객 수가 제한되어 있어서 진작 예매해야 한다. 그래도 마추픽추에 가는 이들에게 몬타냐는 절대 가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이유는 곧 알게 된다.)


여행사를 끼면 보통은 콜렉티보 혹은 기차를 통해 마추픽추가 있는 마을인 '아구아칼리엔테스'로 이동한다.

1. 기차를 탈 경우 쿠스코 → 오얀따이땀보(콜렉티보) , 오얀따이땀보 → 아구아칼리엔테스(기차)
2. 기차 안 타고 기찻길 걸어갈 경우 쿠스코 → 이드로일렉트리카(콜렉티보), 이드로일렉트리카 → 아구아칼리엔테스(기찻길 도보 3시간)의 경로로 갈 수 있다.

보통 돈이 많으면 1번, 시간이 많으면 2번이다. 마추픽추 마을까지 가는 페루 레일 기차가 꽤 비싸기 때문이다. 한때 꽃보다 청춘에 나온 마추픽추행 기차에 낭만을 품고 있었으나 기차값을 확인하고는 넌더리를 냈다. 차라리 3시간 트래킹이 훨씬 낭만적이다.


우리는 이날 한국인 4명이 모여서 오얀따이땀보까지 택시를 타고 갔다. 나, 정우형, 나머지 두 분은 커플인데 직장에 휴가를 내고 2주간 마추픽추와 우유니를 보기 위해 여행을 왔다고 한다. 가는 내내 재미없는 내 개그에도 빵빵 웃어 주시던 슈퍼동안 32살 형(이름도 못 여쭈어봤다.) , 얘기하다 보니 금세 오얀따이땀보에 도착했다. 산새가 정말 아름다운 마을이다.

안데스 전역에는 약 10000km에 달하는 '잉카인의 길'이 있다. 거대했던 잉카 제국의 규모를 잘 나타내 주는 길인데, 그 길의 중간중간에 쉬어가는 여관처럼 설치한 것이 '땀보'다. 그중에서도 오얀따이땀보는 마추픽추로 가는 거점이어서 현재도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기차를 타고 올라가는 두 분과 인사를 했다. 이제부터 정우형과 나는 이드로일렉트리카까지 가는 콜렉티보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섰다. 이때부터 고난은 시작되었다.


광장 앞의 경찰 : "광장 앞에서 이드로일렉트리카 가는 버스가 4시에 있으니 기다려봐요."
잡상인 아줌마 : "아마 콜렉티보로는 거기까지 못 가. 오늘 3~4시쯤에 산타마리아 가는 버스가 여기로 올 거야."
광장 앞 카페 주인 : "산타마리아 가는 버스 오늘은 여기서 안 서요."
콜렉티보 주차장 아저씨 : "저~기로 돌아서 대로로 나가야 산타마리아 가는 콜렉티보를 찾을 수 있을 거야."


결국 말씀하신 방향으로 길을 따라 대로로 나갔다.


대로 앞 버스 아저씨 : "저쪽에 보이는 노란 간판 앞에 서 있으면 산타마리아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어요. 한 세네시쯤 오나?"
노란 간판 앞 자동차 아저씨 : "여기서는 버스 잡기 힘들어. 광장 가서 타는 게 더 나을걸?"


우리 보러 어쩌라는 거지? 결국 광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영어가 되는 외국인에게 이드로까지 가는 법을 물었다. 여기선 힘들 거고, 우루밤바까지 콜렉티보를 타고 가면 거기에 터미널이 있으니 가기 쉬울 거란다. 노란 간판 앞에서 불확실한 3시 차를 기다리느냐 vs 외국인들의 말을 믿고 일단 우루밤바에 가느냐!

도박이었는데 정우형의 선택을 따라 우루밤바로 가기로 했다. 30분쯤 걸려서 터미널에 도착했고 거기서 또 뚝딱이를 타고 길에 있는 작은 터미널로 이동했다. 그곳 주인이 처음에는 "20분 뒤에 산타마리아행 버스가 올 거예요. 인당 15 솔이에요!"라고 했다. 그런데 잠시 후, 이곳저곳 전화해 보더니 "오늘은 표가 없네요."한다. 또 잠시 후, "입석표가 있는데, 10 솔이에요."
휴. 입석이 어디야.

터미널 슈퍼에서 사 먹은 1 솔짜리 스틱 치즈는 너무 짰다. 그래도 아침에 사놓은 바게트 빵과 같이 먹으니 그런대로 괜찮았다. 20분 뒤 온다던 버스는 2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나는 정우형이랑 땡볕에 앉아서 치즈를 씹고, 바게트를 뜯고, 어느 원주민이 포대에 넣어 묶어놓은 오리가 살아서 움직이는 꽥꽥 소리를 들으며, 원주민 아이의 재롱을 구경하기도 하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버스가 도착했다. 차장 꼬마가 15 솔을 요구한다. 계속 10 솔만 주고 뻐기니까, 5 솔을 더 달라고 손을 내민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고 빡빡 우겼다. 짧은 스페인어로 "노 떼네모스 시야스!"(우리 입석이야.)를 반복했더니 포기하고 그냥 갔다. (이런저런 일이 있지만 나는 여전히 페루를 사랑한다. 애로사항 하나하나에 목매는 건 가난한 대학생의 배낭여행 콘셉트와 맞지 않다.)


그렇게 꼬불꼬불한 산길을 4시간 동안 달리는데 서있기 너무 힘들어서 바닥에 주저앉아 갔다. 원주민 아줌마가 데리고 탄 오리도 처음에는 꽥꽥 거리더니 꼬불 길이 지쳤는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중간에 잡상인이 타서 볶음밥을 팔았다. 옆에 앉은 부녀가 나란히 사서 먹고 있는데, 버스가 출발하더니 잠시 후 불이 꺼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먹는 것도 동시에 멈췄나 보다.


하... 해는 이미 저물었는데. 우리, 마추픽추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까요 형?

(투비 컨티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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