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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Mar 29. 2017

#14 황금도시의 전설이 살아나는 곳

페루 쿠스코 (Cuzco)

와라즈에서 리마까지 8시간, 리마에서 쿠스코까지 죽음의 길 24시간. 두 구간 모두 Cavassa 버스를 탔다. 2층 버스인데 쾌적하고 저렴하며 안전운행을 해서 나 같은 배낭여행자에게 딱 좋은 회사다.

쿠스코는 내가 남미 여행 중 가장 사랑한 도시이다. 여행 끝나고 돌아온 지 1년이 넘었는데도 아르마스 광장 구석구석이 눈에 훤하다. 눈을 감고 쿠스코를 상상하면 그 지도가 머릿속에 세세하게 그려진다. 마추픽추만 보고 떠나려 했는데 물가도 저렴하고 사람들도 좋고 풍경도 좋아서 2주 넘게 머물렀던 도시. 호스텔 주인, 그 아들하고도 친해져서 정들었던 도시. 거기 그냥 있는 게 너무 좋아서 대성당 앞 계단에 앉아지는 해를 바라보기도 하고, 현지인들이 밥 먹는 시장에서 더 현지인처럼 게걸스럽게 1500원짜리 한 끼를 해치우기도 하고, 주일날 성당에서 예배드리는데 미사를 못 알아듣는 게 너무 졸려서 5분 만에 나오기도 하고, 나와서 길 건너는데 마침 그 타이밍에 그 자리에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기도 하고.

쿠스코 하면 단연 마추픽추이지만, 쿠스코 자체가 주는 매력도 철철 넘친다. 자, 이제 가난한 대학생이 가장 사랑했던 도시, 쿠스코로 함께 떠나보자.


2016년 1월 15일

죽음의 길에서 24시간을 보내는 법

와라즈에서 출발한 버스는 아침 일찍 리마에 도착했다. 이미 멕시코, 콜롬비아, 에콰도르에서 수도 느낌을 파악했기에 리마 구시가지는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미라플로레스는 부자들이 많이 사는 신시가지인데 여행 막판에 한국 돌아가는 길에 푹 쉬기 위해 들리고 싶다. 그래서 바로 쿠스코에 가기로 결정했다. 리마에서 쿠스코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 1. 비행기로 간다. 비싸지만 금방 가고 안전하다. 2. 버스로 간다. 저렴하지만 24시간이나 걸리고 아주 간혹 안데스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대형 사고가 발생한다.

브런치 아이디부터가 '가난한대학생'인데 비행기 탈 돈이 어디 있겠는가. 남는 것은 시간이지 라는 생각으로 주저함 없이 버스를 선택했다. 버스 시간이 저녁밖에 없어서, 남는 시간을 활용해 리마 구시가지를 돌아다녀 봤다.

드디어 쿠스코로 가는 버스를 탔다. 사실 타기 전까지 많이 고민했다. 에콰도르에서 만난 에두아르도가 해준 말이 마음에 걸렸다. "얼마 전에 페루 산간지역에서 버스가 굴러 떨어졌대. 종종 있는 사고라던데." 이렇게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안데스 지역의 버스와 관련된 괴담이 많다. 이런 얘길 들었는데 안무서울 수 있나! 그래도 나는 "설마 죽겠어?"라는 마음으로 탔다. 자, 이제부터 죽음의 길 버스에 대해 생생한 리뷰를 해보겠다.

조금 일찍 예약하면 이렇게 2층 맨 앞에 앉아서 갈 수 있다. 마치 드라이브하는 기분이어서 지루하지 않고 풍경도 가장 잘 볼 수 있다.

솔직히 말하면, 산길이 상당히 비좁은데 커브가 계속된다. 리마에서 쿠스코까지 직선거리는 짧지만 험준한 산맥으로 이어져 있어서 도로가 구불구불하게 나 있다. 그래서 24시간이나 걸리는 거다. 당연히 위험하다. 다만 Cavassa 기사님은 절대적으로 '안전운행'을 해 주셨다. 창밖을 보면 바로 옆이 아찔한 절벽이고 도로는 꾸불꾸불하다. 하지만 아주 천천히, 부드럽게 운전해 주셨기에 무섭지는 않았다.

그러니 시간은 많은데 돈 없는 나 같은 여행자 분들은 안심하고 버스 타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지루하지 말라고 이렇게 예쁜 포장 안에 간식거리를 넣어서 준다.

처음엔 24시간 동안 뭘 할지 몰랐다. 엄청 지겨울 것만 같았다. 스페인어 단어장과 읽을 책을 보조 배낭에 챙겨서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24시간 내내 창밖으로 아름다운 산길 풍경이 이어진다. 낮이 되면 먹고 자고, 밤이 되면 또 자고를 반복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가있다. 휴대폰에 음악 하나 없고, 인터넷도 안 된다. 그래도 지루하지 않았다. 이것도 좋은 유전자인 것 같다. 창밖을 바라보며 멍을 잘 때리는 것.


2016년 1월 16일

호스텔 미라도르시토

쿠스코에 도착했다. 어제 현금 인출을 이상한 은행에서 해버려서 수수료가 14 솔 (약 5000원)이나 나왔다. 이거 회복한답시고 터미널 내려서 숙소가 있는 아르마스 광장까지 약 30분을 걸어갔다. 배낭여행 1달이 넘어가니 드디어 배낭의 무게가 체감되기 시작했다.

아르마스 광장 올라가는 길에 있는 동상으로, 잉카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파차쿠텍 왕의 기념비다. 쿠스코가 잉카 제국의 심장부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니 여행이 더 설렌다.

호스텔을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녀 봤는데 언덕을 오르고 또 오르면 있는 "Miradorcito"로 정했다. 더블룸이 20 솔(약 7000원)로 저렴하고 와이파이도 빵빵하다. 호스텔 입구에 한국분이 친절하게 "아침밥 맛있어요"라고 써 주셨는데 내가 갔을 땐 아침식사는 빵과 잼이 전부였다. 호스텔 이름인 미라 도르시 토의 뜻은 전망대이다. 그래서일까 2층 창가에서 바라보는 황금도시의 야경이 기가 막힌다.

첫날밤 룸메이트 아저씨였다. 쿠스코 돌아다닌 얘기를 신나서 하시더니, 오늘 샀다며 이상한 마법 지팡이 같은 걸 꺼내셨다. 그 지팡이를 입으로 가져가시더니 후~~ 하고 분다. 피리 같은데 좀 더 두껍고 매력적인 소리가 났다.


2016년 1월 17일

지구 반대편에서 동창을 만났는데 하는 말이 "한국인이세요?" 라면.

7시에 눈이 떠졌다. 어제 분명 호스텔 주인 미옐아저씨가 아침 7시부터 식사가 제공된다고 했는데.. 리셉션에는 미옐 아저씨의 아들 케빈만 청소하느라 분주하다. 그 사이 나는 책꽂이에 꽂혀있던 한국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어느 서양 남자애가 케빈한테 아침 달라고 조르자 그제서야 케빈이 나가서 빵을 사 가지고 왔다.

엄청 여유 부리고, 한국에 있는 친구랑 영상 통화도 하다가 10시쯤 빨래를 널고 주섬주섬 짐을 꾸려 시내 구경에 나섰다. 전체적으로 갈색 풍의 깔끔하고 정갈한 느낌이 난다. 원주민 건물을 부수고 화려한 색색깔 집들을 새로 올린 다른 식민도시들과는 다르게 대부분 건물에서 잉카시대에 축조한 돌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윗부분만 다시 지어 올린 것이다. 그만큼 잉카의 석조 기술이 뛰어났음을 말해준다고.

쿠스코에 아직도 남아있는 잉카길. 저렇게 돌을 빼곡하게 잘라서 카드 하나 들어갈 틈이 없게 만들어 놓았다. 지진에도 끄덕 없는 잉카의 기술력은 현대 과학으로도 쉽지 않다고 한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호스텔 까지는 이런 언덕을 몇 번 올라야 한다. 비오는 날엔 꽤 미끄럽다. 구석구석에 기념품 가게가 있고, 노점상도 많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내려오면 있는 산토도밍고 교회. 그런데 좀 마음이 아프다. 식민지배로 인해 우리 역사가 왜곡되고 유산이 파괴된 아픔이 있는 나라에 살아서 그런가? 처음 쿠스코에 도착한 스페인 정복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잉카의 신전 꼬리깐차는 신전 자체가 눈부시게 황금으로 빛났다고 한다. 신전의 문과 지붕이 황금으로 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복자들은 황금 신전을 모두 허물고 그 위에 보란 듯이 유럽 양식의 성당을 세웠다. (중남미 아스테카 문명도 마찬가지다.) 그 엄청난 양의 황금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열었고 지금 서양이 가진 막강한 부와 복지의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중남미 여러 나라는 여전히 가난하다. 500년이 지난 일인데 글을 쓰는 와중에도 억울해 죽겠다.


한 가지 고소한 사실은 1950-60년대 대지진 당시, 산토도밍고 교회는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꼬리깐차의 초석은 지진을 견뎌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신승리라도 하면 마음이 좀 개운할까? 아무튼, 이런 곱지 않은 시선으로 성당을 바라보니 하나도 예쁘지 않았다.

잉카 신전 '코리칸차'를 허물고 세운 '산토도밍고' 교회.

주말이라 그런지 광장 근처에서 장이 열렸다. 시장 가는 길에 천막들이 모여서 이것저것 팔고 있었다. 여기 상당히 저렴하고 페루에만 있는 현지 음식을 많이 맛볼 수 있다. 내 눈과 입을 가장 많이 사로잡은 것은 과일 케이크! 단돈 3 솔(1100원)에 살살 녹는 최고의 맛을 경험했다. 씨가 씹히는 게 고소하고 과즙은 상큼한 마라꾸야 치즈케이크, 블루베리 치즈케이크 등. 상큼함과 달콤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저녁을 먹기 위해 그 천막을 다시 찾았다. 낮과는 다르게 상점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저렴한 가격에 현지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여전하다. 맛있다기보다는 그냥 싸고 현지인의 입맛 체험? 정도다. 무엇보다 위생에 놀랐다. 접시 씻는 과정이 어마무시하다. 설거지를 따로 하지 않고 먹고 난 그릇은 그냥 고인 물에 한번 쓱 씻고 만다. 나는 비위가 워낙 강해서 신경 안 쓰고 먹었지만, 비위 약한 분들에게 시장 음식은 비추천이다.

어릴 적 강원도 이모할머니 손 잡고 장에 가서 먹었던 올챙이국수 맛이다. 열무김치가 생각난다. 다시 먹고 싶지는 않은 그 맛이다.



주일 예배를 드리고 싶어서 가까운 성당에 들어가 봤다. 미사 분위기가 상당히 경건하다. 그런데 여행의 피로가 쌓였는지 예배는커녕 너무 졸려서 집중이 안된다. 스페인어도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그래서 맨 뒷자리에 잠시 있다가 짧게 기도를 드리고 나왔다. 나와서 길 건너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저 멀리서 익숙한 얼굴이 보이지 않은가? 고등학교 동창 지연이가 남미 여행 중이라고 페이스북에서 본 것 같은데, 설마 쟤가 진짜 지연이?라는 마음으로 툭, 치니까 1초 뒤

"너.....!?"

"원희!?!?!?!?"

그렇게 고등학교 동창을 5년 만에 지구 반대편에서 만났다. 처음엔 한국인인지 모르고 그냥 신경 안 쓰고 지나치려고 했단다. 내가 일본인 + 현지인 혼혈 느낌이 난다나. 고등학교 스쿨버스에서 같이 꾸벅꾸벅 졸던 이 친구가 어느덧 이렇게 성장해서 남미 여행을 하고 있구나. 아마 서로에게 같은 기분을 느꼈을 거다. 신기하다. 하필 그때에 예배를 드리고 싶었고, 하필 그때에 피로가 쌓여 성당에서 나왔고, 길을 건너던 그 친구를 만났다. 지연이도 일행이 있었고 짧은 일정으로 남미 곳곳을 다니는 여행 중이었기에 오래 같이 있진 못했지만 정말 반가웠다.


그리고 이어지는 쿠스코 야경 감상!

밤이 되자 가로등에 황금빛 불이 들어와서 성당과 건물을 비추었다. 비록 더 이상 잉카의 신전은 남아있지 않지만, 아르마스 광장 계단에 앉아서 이렇게 해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황금도시 쿠스코의 전설이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다. 광장에서 쿠스케냐(페루 맥주)한 잔을 곁들이면 완벽하다. 그렇게 나는 쿠스코와 사랑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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