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대가리 Mar 29. 2017

#13 안데스 골짜기의 파란 호수

페루 와라즈(Huaraz)

1월 12일 새벽 1시, 에콰도르에서 페루로 넘어가는 국경 심사대. 누가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길래 '나랑 이름이 같은 사람이 있나 보네.'라고 생각하며 무시하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나를 톡 톡 쳤다. 뒤를 돌아보니 바뇨스에서 만난 에두아르도였다. 이런 기막힌 우연이! 반갑게 포옹하고 인사를 했으나 다른 버스를 타고 가야 했기에 곧 다시 이별했다. 기약 없는 만남을 약속하며. 그리고 드디어 꿈에 그리던 페루에 도착헀다.

2016년 1월 12일

국경을 넘어 페루로

페루에서 처음 먹은 음식은 바로 치파(중국집)였다. 남미 현지식에 질려가고 있던 터라 오랜만에 아시아 향신료를 맛볼 수 있어서 좋았다. 잉카 콜라와 함께 먹었는데 익히 들었던 것처럼 불량식품 느낌이 난다. 맛없진 않은데 밥이랑 같이 먹기엔 좀 부담스러운 맛이다. 여기서 잠깐, 잉카 콜라가 뭐지? 하시는 분들을 위해. 잉카 콜라는 코카콜라에 대항하는 페루 고유의 콜라이다. 예전 우리나라에서 콜라독립을 모토로 꽤 잘 나갔던 815 콜라 정도라 생각하면 되겠다. 근데 잉카 콜라 페트병에 이미 코카콜라 마크가 찍혀있는 걸 보면 독립은 물 건너간 것 같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잉카 콜라 맛의 특급 비법은 잉카인의 '침' 이라던데!? (물론 100% 루머다.)

한국인의 성지, 아킬포

와라즈 터미널에서 내려 센트로 쪽으로 이동했다. 아무 생각 없이 눈에 보이는 호스텔로 가야지 했는데 거기가 바로 와라즈에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아킬포 호스텔이었다. 15 솔(약 5000원)의 저렴한 가격, 깔끔한 침대, 한국인을 좋아하는 친절한 직원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나는 수많은 한국인들! 확실히 멕시코, 콜롬비아, 에콰도르에서는 한국인을 거의 못 봤는데 페루에 오니 많이 볼 수 있었다. 이날은 호스텔에서 만난 한국인 경륜이와 동행했다. 초록 머리가 인상적인 경륜이도 나처럼 미국에서 교환학생을 마치고 남미로 왔단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다시 갈 수 있을지 모를 이곳은 기회의 땅, 남미다.


와라즈는 69 호수 같은 트레킹 코스로 유명하다. 다만 센트로도 하루 일정을 잡아 여유롭게 돌아다닐 만했다. 시장도 꽤 크고 아주 저렴한 값에 과일, 음식을 구할 수 있다. 경륜이와 시내를 마구 싸돌아다녀서 과일을 샀다. 망고, 딸기, 오렌지, 사과를 배 터지게 샀는데 겨우 9 솔밖에 안 들었다. (약 3200원) 필리핀에 같이 갔던 형에게 배운 망고 손질하는 법을 여기서도 유용하게 써먹었다. 씨를 중심으로 반을 가르고, 씨앗 부분을 또 가르고 나머지 알맹이는 칼집을 내서 뒤집어 까는 방법이다. 경륜이는 이 방법이 신기했나 보다. 나중에 페이스북에 '망고 쉽게 손질하는 법'이라는 영상이 올라왔는데 거기 내 이름을 태그 했다. 다음부터는 이렇게 쉽게 좀 해봐요 오빠! 이런 의미였을까?

아킬포 옥상에서 바라본 뷰. 사진으로 담지는 못했는데 새벽 5시 쯤 눈을 떠 바라본 와라즈의 하늘엔 별이 무수히 많았다.

경륜이가 어느 블로그에서 와라즈 길거리 닭꼬치가 그렇게 맛있다고 하는 걸 봤다길래 하나 사서 나누어 먹었다. 근데 저 닭꼬치, 굉장히 맛없다. 고무 같다. 심지어 경륜이는 물갈이까지 했다. 역시, 블로그든 여행책이든 너무 신뢰할 게 못 된다. 호스텔에 돌아와서는 다음날 69 호수 투어 신청을 했다. 호수까지 가는 트레킹이 꽤 힘들다던데 괜찮을까? 걱정이 된다. 키토에서 고산병을 앓았는데 그보다 훨씬 높은 와라즈에서는 아직 아무 증상이 없었다. 한 번 적응돼서 그런 거려나.

이 사진을 보며 처음 느꼈다. 아 ! 현지인이 되가는구나.

2016년 1월 14일

입이 쩍 벌어지는 이곳은 안데스

69 호수 트레킹에 나섰다. 고산병에 지레 겁먹은 경륜이는 소로체(고산병 약), 코카 사탕까지 챙겨 왔다. 휴식하는 곳에서 주는 코카 잎도 잊지 않고 씹었다. 올라가는데 확실히 서양 애들 속도가 빠르다. 체력이 좋은가 보다. 이미 3000미터가 넘는 고지대인데 계속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이거 완전 죽음이다.

1번 호수. 이 호수를 기준으로 69번째 있는 호수가 바로 69호수다. 이름 참 대충 지었다.

죽음의 트래킹이지만 그래도 트래킹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69 호수까지 가는 길이 너무너무 아름답기 때문이다. 사진으로 보면 소들이 풀을 뜯고 노는 안데스 초원처럼 평화로워 보이는데, 평지는 아주 일부다. 계속 오르막이고 걷다 보면 죽을 것 같다. 자연은 괜히 위대한 게 아닌가 봐.. 그렇지만 우리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씩씩하게 달려왔다. 우리랑 같이 올라오던 한국인 커플 분들은 중간에 싸우시고는 쭉 따로 다니시던데. 근데 이 커플분들 어쩌다 쿠스코에서도 마주쳤는데, 그땐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때 와라즈에서는 싸우신 것 같았는데, 화해하셨나 봐요?" 여쭈어보니 "어머 저희가 언제 그랬어요~" 라며 발뺌하셨다. 사이좋은 연인도 싸우게 만드는 악명 높은 69 호수 트레킹 인증!

드디어 저 멀리, 파란 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69 호수에 갈 때는 옷을 잘 입어야 한다. 얇게 여러 벌 입는 게 가장 현명할 듯싶다. 고산지대여서 처음 등반할 땐 춥지만 오르다 보면 더워진다. 꼭대기에서는 분명 만년설이 보일 정도로 추운데, 올라오느라 열이 나서 반팔 차림으로 있었다.

이 사진을 본 친구가 "배경은 일부로 흑백처리 한거야?" 라고 물어봤다. 흑백이 아니고 리얼이다. 안데스의 만년설 바로 아래, 이렇게 멋진 호수가 있다.
당 보충을 위해 챙겨간 쵸콜렛이 모두 녹아있었다. 덕분에 누텔라처럼 빵 사이에 발라먹었다.

다시 내려가는 길. 어떤 사람들은 등산보다 하산이 더 힘들다고 했는데 다리가 좀 후들거리긴 했지만 나는 괜찮았다. 같이 올라간 경륜이는 내리막길에 고산병이 제대로 도졌는지, 저지대로 내려갈 때까지 맥을 못 추었다. 너무 안타까웠다.

하산을 다 하면 다시 차를 타고 와라즈 시내로 돌아간다. 이때 돌아가는 길은 완전 비포장이고 엉덩이가 들릴 정도로 들쑥날쑥했다. 하지만 나는 축복받은 유전자로 인해 그런 환경에서도 꿀잠을 잤다. 경륜이가 날 보고 놀랬다.


아킬포에는 두 직원이 있다. 자신을 디카프리오 라 소개하는 레오나르도, 그리고 데이비드. 디카프리오는 위트가 있다. 스페인어에서 남자(사람) 친구를 아미고, 여자(사람) 친구를 아미가라고 하는데 이를 응용해서 남자 한국인들에게는 친구~ 라 부르고 여자 한국인들에겐 친가~라고 부른다. 스페인어를 모르는 한국 분들이 친가가 뭐냐고 어리둥절해할 때 설명해 주면 빵 터지는데, 이 모습을 보며 레오나르도와 데이비드도 까르르 웃는다.

아킬포를 떠나는 날. 하루 15 솔이라는 미친 가격 때문에 2박을 고민했지만 리마 가는 버스 편을 고려하여 그냥 1박만 하고 밤 버스를 탔다. 겨우 1박 밖에 안 했지만 호스텔 직원들, 한국 사람들과도 많은 정이 들어버렸다. 물가도 싸고 별도 많이 뜨는 이 아름다운 곳, 언젠가 다시 오리라!

매거진의 이전글 #12 사탕수수에 싹튼 우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