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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Mar 28. 2017

#12 사탕수수에 싹튼 우정

에콰도르 바뇨스 (Baños)

아침 일찍 Mitad del mundo(세상의 중심) 적도 박물관을 갔다가 오후에 바뇨스로 넘어가려고 했으나 고산병 증세가 심해졌다. 다행히 두통은 없으나 숨이 가쁘고 오래 걷기가 힘들다. 눈 쪽에서 강한 압력이 느껴지며, 어젯밤엔 체하기 까기 했다. 바뇨스의 고도는 2000미터가 안 된다고 하니 일단 버티는 수밖에. 3000미터 미만에서 벌써 고산병으로 한바탕 하다니 민망하다. 고산병의 원인은 체력이 아닌 체질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2016년 1월 8일

여기가 정말 세상의 중심이에요?

계속해서 정감 가는 나라, 에콰도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과일의 물가가 상당히 저렴하다는 것. 매일 아침으로 망고 2개, 바나나, 빵 2조각을 사 먹었는데 다해서 1.5불이면 살 수 있다. 너무너무 사랑하는 망고, 또 너무너무 사랑하는 바나나를 슬라이스 해서 크루아상과 함께 아침으로 먹으면 만사 제치고 이게 바로 행복이지 싶다.


적도 박물관에 가는 길은 모르지만 일단 호스텔 주인이 알려준 데로 가서 버스를 탔다. 박물관 입장료는 무려 7.5불이다. 나중에 안 건데, 사진 속의 저 노란선은 진짜 적도가 아니라 전시용이라고 한다. 박물관 밖에 빨간 선으로 실제 적도를 표시 해 놓았다던데.. 완전 진짜처럼 해놓아서 깜빡 속았다. 돌아오는 길에 그 사실을 알게 돼서 씩씩거렸지만 뭐 어쩌겠어. 박물관에 나름 볼거리가 많았으니 만족해야지.

그 유명한 적도 라인 위에서 날계란 세우기.

다시 호스텔로 돌아와서 마얀과 호스텔 직원 유리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유리가 같이 사진을 찍자고 먼저 제안했다. 매일 밤 누워서 책 읽고 일기 썼던 그 소파에 나를 앉히더니 독사진을 찍어갔다. 조심히 여행하라고 격려도 잊지 않았다. 바뇨스로 가려면 키툼베터미널에서 버스를 타야 한다. 터미널까지 약 40분 지옥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키토의 시내버스 시스템은 정류장 안에 있는 직원에게 0.25불을 내면 바를 밀고 들어가서 기다렸다가 버스가 오면 타는 식이다. 그런데 버스가 도착한 틈을 타서 정류장과 버스 승강구 사이 틈새로 쏙 들어가 무임승차하는 청년들이 있다. 지켜보며 나는 혀를 끌끌 찼다.  아. 근데 나는 정말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그 애들이 갑자기 버스가 도착하자마자 뛰니까, 나도 모르게 따라 뛰어갔다. 나도 모르게 버스에 탔다. 무임승차를 한 거다. (스스로에게도 혀를 찼다. 쯧쯧..)


터미널에 도착하니 바로 바뇨스행 버스가 있었다. 분명 4.5불이라 해서 5불을 냈는데 빨리 뛰어가라고, 출발한다고 재촉한다. 손바닥을 창구로 내밀며 한국어로 "잔돈 안 줘?" 크게 소리쳤더니 "노! 노!" 라며 계속 재촉한다. 다시 "잔돈 줘요!"라 하니까 그제야 5센트짜리 2개를 내민다. 뭐야! 터미널세가 40센트나 할 리는 없는데. 에라 모르겠다. 그래 몇백 원 가져라. 무임승차한 거 대가를 치렀다 생각했다. 그리고서 그냥 그 아저씨를 따라 뛰어갔다. 늘 그랬듯이 정차하는 곳마다 잡상인 서너 명이 타고 내린다.

바뇨스는 길거리 음식이 발달 되어 있다. 끼니를 때우기 충분할 정도로.

바뇨스는 에콰도르 내에서도 액티비티로 유명한 관광지이기에 안전하다. 밤늦게 터미널에 도착했지만 호스텔까지 걸어서 아무 사고 없이 갈 수 있었다.


2016년 1월 9일

생과일주스 주세요, 설탕 가득 담아서.

아침이 밝았다. 액티비티로 무엇을 할지 계획을 짰다. 오전에는 자전거를 렌트해서 디아블로 폭포까지 다녀왔다. 입이 쩍 벌어지는 안데스 능선을 양 옆에 끼고 다운힐이 계속돼서 스릴이 넘친다. 중간에 멈춰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개 한 마리가 짖으며 날 향해 달려왔다. 너무 놀라서 순식간에 굉음 같은 비명 "어으!! 아!! 악!! 아으으으으악!!!"을 질렀다. 그러자 그 강아지, 졸았는지 멈추었다. 후. 심장 쫄깃했다.

폭포를 찍고 다시 돌아가는 길. 오르막은 자전거를 타고 갈 엄두가 나질 않아서 트럭을 이용했다. 요금은 1인당 2불이고 5명이 모이면 출발한다. 약 2시간을 기다렸는데 중간에 사람이 하도 오지 않자 트럭 주인이 "10불 내고 갈래요?"라고 물어봤다. 단칼에 거절했다. 가난한 대학생이다. 돈은 없지만 시간은 많다. 기다리는 동안 길거리 음식 먹방을 했다.

폭포를 보고 나오는 길에 파는 0.5볼짜리 쵸코아이스바나나가 별미다. 
바나나를 구워 반으로 갈라서 치즈를 넣은 간식이다. 작은거 하나 먹고 너무 맛있어서 3개 먹으니 어느덧 배가 불러왔다.

바뇨스 마을로 다시 돌아와서 중앙시장을 갔다. 시장의 명물, 8개 1 불하는 엠빠나다와 생과일 주스를 먹었다. 생 딸기에 물과 갈아서 먹었는데 난 당연히 딸기에서 단 맛이 날 줄 알고 설탕을 빼 달라고 했다. 그런데 마셔보니 맹물에 레모나 탄 듯한 찝찝한 맛이 나길래 설탕을 넣어서 다시 갈아달라고 했다. 그러자 내가 알던 그 생과일 주스 맛이 났다. 깨달았다! 생과일 주스에는 설탕이 (그것도 꽤 다량으로) 필수라는 것.


생과일 주스를 후루룩 들이키며 나무집 (일명 세상의 끝 그네)으로 향하는 버스에 탔다. 만석이어서 앞 문 바로 앞에 털썩 앉아서 갔다. 중간중간 사람이 내리고 탈 때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비켜주어야 했다. 그러고 있는데 누군가가 더 바깥쪽, 완전 문 계단에 앉더니 말을 걸어온다.

"Hi, how are you?"

유쾌한 멕시코 친구 에두아르도와의 동행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세상의 끝 그네를 서서 타는 당신은 최소 한국인

에두아르도는 영어를 잘한다. 가는 내내 목마르지 않냐며 사탕수수를 나누어주었다. 생긴 건 스틱 과자 같기도 하고 씹는 질감은 나무껍질 같은데 쪽쪽 빨아먹으면 진짜 단물이 나온다. 더 이상 단물이 안 나오면 버리면 된다. 갈증 해소에 직빵인 신기한 열매다.

이 친구, 능력자다. 이제 막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는 멕시코에서 본인 사업을 시작했다. 꽤 잘돼서 올해 점포를 3개로 늘릴 거라고 한다. 무슨 사업이냐고 물어보니 스무디를 판다고 했다. 여름에만 장사가 되니까 여름 내 모아둔 돈으로 겨울엔 이렇게 여행을 다닌다고 한다. 3주 동안 멕시코 전국을 여행한 이야기가 재밌었다.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산 꼭대기에 도착했다.

이 친구 엄청 잘생겼는데 사진빨을 잘 안받는다.

세상 끝 그네를 기대하고 온 곳인데 거기 풀 밭에 앉아서 보는 안데스 산맥의 전망이 탁 트여서 예술이 따로 없다. 에두아르도는 하늘을 나는 독수리를 보며 다음 생에 독수리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다. 이 친구 꽤 문학적이다. 아까는 바뇨스 온천탕에 들어가 있는 많은 사람들을 '뽀요 수프' (닭고기탕)로 묘사하더라니. 아무튼 세상의 끝 그네에 탑승해봤다. 앉아서 타면 싱거우니까 서서 탔다.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다. (아무나 따라 하지는 마세요)

그네를 타면 보이는 뷰는 대략 이렇다. 아찔하다.

다시 바뇨스로 돌아가는 버스. 좌석에 앉았으나 곧 어르신들이 타셨고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자연스레 자리를 양보해 드렸다. 에두아르도는 "다시 우리 자리로 돌아갈까?" 하며 아까 올 때 앉았던 문 앞 그 자리에 착석하더니 "Hi, how are you?"라고 말했다. 우리의 대화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외국인 친구와 오랜만에 폭소했다. 돌아와서 호스텔에서 잠시 꿀잠을 자고 약속대로 에두아르도와 시장에서 저녁을 먹었다. 에두아르도는 기니피그를 도전했는데 쥐처럼 생긴 녀석을 한 입 베어 물더니 "음.. 맛없다. 그렇지만 새로운 걸 도전했으니 만족해."라고 유쾌하게 말했다. 그 뒤로도 바뇨스 시내를 쏘아 다니며 놀았는데 자세한 대화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헤어질 때 나는 한국 문양이 새겨진 손톱깎이를 선물로 주었다. 너무 좋아한다.

바뇨스를 흐르는 폭포 앞에서.

또 이별이다. 오늘 밤 버스로 과야킬에 간다고 하니, 아쉬우나마 멕시칸 식으로 작별인사를 했다. 그래. 언젠간 다시 멕시코를 방문할 거니까. 그때 꼭 연락할게, 동갑내기 내 친구!


사랑해요 에콰도르

원래 이날은 캐녀닝을 했다. 로프에 안전장치를 한 뒤 폭포수가 흐르는 물길 그대로 암벽을 타고 내려오는 액티비티이다. 그런데 캐녀닝을 하면서 찍은 사진을 메일로 보내준다던 여행사는 1년째 감감무소식이다. 캐녀닝 관련 이야기는 할 수 없겠다.

다음 도시, 페루로 넘어가는 관문인 쿠엔카로 이동하기 위해 저녁 6시 35분 차로 리오밤바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 뒷자리에 앉았던 부부가 자꾸 의자 차고, 시끄럽게 굴어서 맘에 안 들었다. 하지만 버스 내리고 나서는 밤이라 위험하니 5분 거리이지만 터미널까지 동행 (이라기보다는 내가 일방적으로 따라감) 했다. 두 딸아이를 각각 손에 끼고 걸어가는데 아내분이 한 손에는 딸, 한 손에는 무거운 짐을 들고 있길래 짐을 들어드렸다.


터미널에 가 보니 오늘은 이미 차가 없고 내일 5:30에나 있다고 한다. 내가 어쩔 줄 모르는 난감한 표정으로 "쿠엔카.. 쿠엔카.." 하니까, 이 아저씨, 스페인어가 짧은 나를 위해 터미널 곳곳을 돌아다니셨다. 그러더니 "택시로 10분 거리에 쿠엔카로 가는 버스를 취급하는 작은 터미널이 있대. 거기라도 가 볼래?" 하신다. (사실 이걸 다 알아듣진 않았지만 그냥 네, 네,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터미널까지 가는 택시도 친히 잡아주셨다. 절대 1.5불 이상 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해 주시며 배웅해 주셨다. 사랑해요 에콰도르! 근데 이 택시기사는 3불을 요구하길래 깎고 깎아서 2불에 터미널까지 이동했다. 다행히 9:30에 쿠엔카 가는 버스가 있었고, 쿠엔카 터미널에 새벽 3시 반쯤 무사히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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