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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Apr 12. 2017

#16 불가사의고 뭐고 나 죽겠네.

페루 - 마추픽추

버스는 9시가 넘어서 산타마리아에 도착했다. 다행히 그 자리에 산타 테레사까지 가는 칠레 커플이 있어서 함께 택시를 탔다. 남자애는 차가운 맥주 쿠스케냐 4개를 사 오더니 우리에게도 나누어 줬다. 페루 맥주 정말 맛있다. 산타테레사에서 그들과 인사하고 우리는 최종 목적지인 이드로일렉트리카까지 가기 위해 택시 기사와 딜을 했다. 인당 20 솔을 불렀는데 너무 비싸서 고민하던 찰나, 아르헨티나 커플이 오더니 그들도 이드로까지 간다고 했다. 내가 화장실 간 사이 정우형이 모두를 설득해서 인당 10 솔에 이드로까지 가게 되었다.


10시 반쯤 되었을까? 드디어 마추픽추 가는 기찻길 트레킹이 시작되었다.


16년 1월 19일

가난한 여행자가 마추픽추를 오르는 법

쿠스코 - (우루밤바 - 산타마리아 - 산타테레사) - 이드로일렉트리카 - 아구아 칼리엔테스
: 여행사에서 그냥 콜렉티보를 이용하면 괄호 안의 과정을 안 거치고 갈 수 있다. 굳이 우리처럼 가면 시간 낭비에 돈 낭비다.

밤이라 그런지 아무것도 안 보였다. 정우형이 가져온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서 침묵 속에 걸어갔다. 이 새벽에 기찻길 트레킹이라.. 낭만적인 거 같긴 한데 3시간 내내 침묵의 연속이었다. 가끔씩 푹 들어가는 구간이 있는데 맨 앞에 선 사람이 "Watch out"한 마디 해주면 멍 때리다가도 정신 차리고 걷게 된다. 한 3시간 반쯤 걸었을까? 아구아칼리엔테스에 도착하니 새벽 2시였다. 안개에 가리운 신비한 마추픽추를 보기 위해서 7시에는 입장을 해야 하니 5시에 호스텔에서 나와야 한다. 

인당 32 솔 (약 11000원)을 부르는 주인에게 "우리는 2시간만 자고 나갈 거예요"라고 하니까 25 솔에 해 주셨다. 대충 잠을 잤다. 이렇게 누적된 허기와 피로는 결국 다음날 일정에서 화를 불러온다.


1월 20일

객기라도 몬타냐는 가지 마세요

아침 5시에 일어나서 마추픽추 올라가는 트레킹을 시작했다. 아구아칼리엔테스(별칭 - 마추픽추 마을)에서 마추픽추를 오르는 방법은 두 가지다. 산기슭이 워낙 가파르다 보니, 가파른 능선을 따라 나있는 경사진 길로 트레킹을 해야 한다. 아니면 평평하지만 꼬불꼬불하게 만들어 놓은 대로에 다니는 버스를 타던가.

1. 꽤 가파른 오르막길 계단 트레킹 (약 1시간 소요, 무료, 힘듦)
2. 버스 (약 30분 소요, 버스비 10달러 이상, 편함)


브런치 이름이 가난한대학생인데 2번을 선택했을 리 없다. 당연히 걸어갔다. 우린 젊으니까! 좀 힘들긴 한데, 여기까진 생각보다 괜찮다. 문제는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못 먹은 데다가 잠도 2시간밖에 못 잤다는 사실이다. 마추픽추는 쿠스코보다 낮긴 하지만 어쨌든 2000미터가 넘어가는 고산 지대이다.


마추픽추까지 올라가는 길에서부터 안데스의 장관을 감상할 수 있다.

도착했다는 기쁨도 잠시, 곧바로 탈수 + 고산병 증세가 찾아왔다. 한 걸음 뗄 때마다 죽겠구나 싶어서 지나가던 한국분께 물을 구했다. 그 물로 겨우 버텼다. 자판기에 물이 있긴 했지만 가격이 상상 초월이다. 이 와중에도 비싼 돈 주고 물을 사는 게 억울했나 보다. 


입장하고 조금 올라가서 마추픽추의 뷰를 멀리서 봤다. 아침 7시라 안개에 가려 있긴 했지만 역시 마추픽추. 사진에서만 보던 세계 7대 불가사의가 내 눈앞에 있으니 곧바로 소름이 쫙 돋았다.

내 또래분들은 윈도우 기본 게임이었던 '틀린그림찾기' 에서나 나오던 마추픽추의 한 장면을 기억 할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어제 만난 그 아르헨티나 커플도 몬타냐에 간다길래 따라갔다. 몬타냐가 전망대 같은 거라길래 한 1시간 올라가겠거니 했다. 그런데 이 길,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어느덧 마추픽추가 저 멀리 보인다.

탈수에 물 없고, 세 끼 굶었고, 2시간밖에 잠을 못 잔 상태로 몬타냐를 올랐다. 고산병이 폭발했다. 중간중간 쉬어가긴 했지만 그때마다 바위에 앉으면 1초 만에 골아떨어질 정도였다. 얄밉게도 서양 애들은 잘만 올라간다. 동양 사람들은 몬타냐에서 거의 안보였다.

말 그대로 '정신 승리'로 3시간 정도 걸려서 정상에 도착했다. 머리는 헤롱 해서 이 경관이 예쁜 건지 어쩐 건지도 모르겠고 그냥 정상 바위에서 또다시 10여분을 뻗어 있었다.


그 상태로 내리막길을 걷자니 다리는 후들후들 속은 울렁울렁 머리는 헤롱헤롱. 하산하는 데는 약 50분이 걸렸다. 고산병에 걸리면 등산보다 하산이 더 힘들다던데 진짜였다.

몬타냐 정상에서 바라보는 우루밤바 강.

이 시간쯤 되니 안개가 걷혀 온전한 마추픽추가 드러났다. 우기인데도 비 오지 않는 맑은 경관을 볼 수 있는 행운! 마추픽추의 진기한 현상 중 하나는 아침 8-9시경에 온 마을에 안개가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다. 이 시간에 오면 분명 방금까지 앞이 안 보였는데 잠시 후 전경이 잘 보이는 신기한 경험을 알 수 있다. 그래. 아무리 힘들어도 안개가 걷혔으니 사진은 찍어야 되지 않겠어? 이런 마음으로 지나가는 분께 사진을 요청했다.

마추픽추에 갓 입장해서 찍은 사진(위)과 몬타냐에서 내려온 후 사진(아래)을 비교해 보시면 알 거다. 몬타냐가 얼마나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었는지! 나의 눈빛은 고산병 때문에 "아 힘들어.." 그 자체였다. 인생 샷 따위는 없었다. 사진 찍은 저 자리에서 그대로 드러누웠다. 멋진 뷰를 감상하며 잠을 청했다. 지나가는 사람이 봤으면 분명 죽었다고 생각했을 거다.


햇빛이 너무 따가워서 일어나 보니 정우형이 마침 그 자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몬타냐에 올라갔다 온 사이에 정우형은 와이나 픽추를 찍고 와서 마추픽추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계셨다. 형을 붙잡아서 내려가자고 졸랐다. 정말 착하시다. 군말 없이 같이 내려가자고 하셨다. 너무 죄송해서 내려가는 중간에 형은 좀 더 구경하고 나는 잉카의 귀한 돌 위에서 잠을 더 청했다. (와. 정말 20불짜리 낮잠이다.) 나도 진짜 구석구석 보고 싶은데.. 언제 다시 올 지 모르는 마추픽추인데.. 근데 정말 돌아다닐 엄두가 나지 않았다. 와이나픽추에 다녀와서는 이제 자기는 무쇠다리가 된 것 같다며 마구 돌아다니는 형이 신기하다. 분명 이 형도 나처럼 3끼 굶고 2시간밖에 못 잤을 텐데.


원희씨는 왜 걸어요?

드디어 출구를 나와서 계단을 조금 내려가니 샌드위치를 파는 아주머니가 계셨다. 아보카도 치즈 샌드위치와 잉카 콜라 작은 사이즈를 합쳐서 10 솔 (3600원)에 샀다. 쿠스코 물가와 비교하면 거의 2 배지만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일단 먹고 마시니 확실히 고산병 증세는 나아졌다. 마추픽추를 완전히 하산하여 아구아칼리엔테스에 도착하니 증상이 정말 사라졌다. 형과 함께 급하게 찾아간 레스토랑에서 볶음밥을 먹으니 이제 좀 살 것 같았다.

"마추픽추 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다시 이어지는 기찻길 트레킹. 정우형은 캐나다에서 워홀을 마치고 모은 돈으로 여행 중이라고 한다. 남들보다 대학도 군대도 늦게 갔지만 늦은 것에 대한 불안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늦다'는 것도 결국 사회가 정해놓은 룰이니까 내가 안 늦었다 생각하면 안 늦은 거지 뭐. 정우형이 물었다.

"원희씨는 왜 걸어요?"

그러게. 내가 걷는 걸 좋아하는 이유가 뭐였더라? 얼떨결에 대답했다.

"생각하려고요."


정우형은 굉장히 젠틀하고 여행 스타일과 라이프스타일도 나랑 비슷한 것 같으니 한국에서 만나도 재밌겠다. (는 1년 넘게 지난 아직도 못 만났다.) 캐나다 워홀 얘기, 읽은 책, 강의 얘기를 듣다 보니 기찻길에서 3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흘렀다. 한참 는데 쿠스코까지 가는 칠레인 2명을 만나서 동행하기로 했다. 밤이라 그런지 콜렉티보 가격은 인당 100 솔이나 했다.


여러모로 돈도 많이 쓰고 손해 본 일정이었다. 고산병에 걸려 마추픽추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그래서 결국 다시 갔다. 허허. 마추픽추에 대한 본격 포스팅은 조만간 할 예정이다.) 정우형은 자기랑 같이 다녀서 이렇게 된 거 아닌지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하셨다. 그치만 난 단 한 번도 정우형을 탓한 적 없었다. 이 모든 게 결국 내 선택이고 누구 탓으로 돌리며 후회할 필요도 전혀 없으니 말이다. 오히려 말이 잘 통하는 좋은 사람을 만났고 혼자 다녔으면 못했을 수많은 경험을 했으니 만족한다.


쿠스코에 도착하니 새벽 2시였다. 밤늦게 왔는데도 미라도르시토의 미옐 아저씨는 친절하게 방을 안내해 주셨다. 방이 없어서 싱글룸+샤워실이 있는 좋은 방을 20 솔에 내주셨다. 미옐 아저씨는 한국인을 참 좋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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