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 마추픽추 트레일
1월 22일
정글 트레일의 첫 코스는 안데스 산새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다운힐을 달리는 것이다. 가이드가 한국인들만 있는 팀으로 오더니 며칠 전 이 투어에서 어느 한국인이 자전거로 묘기 부리다가 앞으로 자빠져서 쇄골 주변이 다 나갔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특별히 주의를 준다.
한국인들, 조심하세요!
해보니 길이 위험하거나 하진 않은데 중간중간 물이 그대로 흘러 계곡이 된 곳을 지난다. 도로변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계곡이라니. 계곡도 계곡이지만 자전거 타면서 보는 안데스 산새가 장관이다.
3시 반쯤 첫날 묵을 산타마리아의 숙소에 도착했다. 날이 너무 더운 데다 에어컨도 없는 이곳. 웃통을 벗고 지냈다. 가이드가 래프팅 할 사람들은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우루밤바 강의 세찬 물줄기를 따라 래프팅이라니, 한국에서 하던 거랑 스케일이 다르겠다. 재밌을 것 같긴 한데 무려 USD30. 나는 수영도 못해서 더 무서웠다. 경민이 형은 “어차피 다시 못 올 거, 래프팅도 후회 없이 하지 뭐. 어디 가도 이 가격에 못 해.”라며 래프팅을 하러 갔다. 나는 (돈이 없어서) 하지 않고 현진이, 찬규와 함께 산책을 했다. 풍경이 우리나라 시골이랑 비슷하다.
짧은 방학을 이용하여 늘 여행을 다니는 두 친구. 인도, 유럽, 네팔 등등 나보다 어린 나이지만 많은 경험을 했기에 대화가 재미있었다. 나도 군대 전역하자마자 다녀왔던 섬진강 무전여행 이야기를 해주니 귀가 솔깃해한다. 사실 우리 나이 때 대학생들이 하는 스펙, 대외활동 이야기와 여행 이야기가 다인데 생각보다 시간이 빨리 흘러갔다.
저녁식사 후, 이 둘과 같이 맥주 마시려고 길을 나서려는데 아까 그 "인생이 휴가지" 어르신이 계셔서 인사를 했다. 우린 그냥 인사를 했을 뿐인데, 그 자리에서 1시간 넘게 기나긴 강의를 들어야 했다. 처음엔 어쩌다 남미에 오게 됐는지 물어보시더니 남미 지역의 치안을 이야기하며 각국의 경찰 얘기를 했다. 갑자기 정치로 넘어가서 우리나라 정치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둥, 그런데 일본은 아베로 인한 재개를 했다는 둥. 중국도 부활하고 있고, 러시아는 과거에 몰락했는데 (그래서 냉전 시대 어떤 과정으로 몰락했는지 다 이야기하시고는) 요즘 푸틴으로 인해 다시 부활을 노리고 있다는 둥. 그러니까 난세에 지도가가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IMF, 김영삼, 갱재,...
나는 원래 일방적인걸 못 버틴다. 교수님 강의도, 목사님 설교도, 내 흥미에 당기지 않는 내용이면 바로 정신줄을 놓아버리곤 한다. 찬규와 현진이는 듣기 싫어도 끝까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들어주더라. 심성이 고운 친구들 인 것 같다. 이야기하신 지 1시간쯤 되었을 때는 일부로 주저앉아서 조는 척을 했다. 정치든 지도자든, 관심 있는 분야지만 내가 이 자리에서 왜 이 아저씨한테 이런 강의를 듣고 있어야 하지? 싶었다. 그리고 이야기는 곧 끝났다. (내가 너무했나?)
그래도 그중에서 감명 깊은? (혹은 열 받는) 이야기가 몇 개 있어서 기록 해 두었다.
1. 관광의 '관(觀)'은 볼:관. 즉, 내 입장에서 그 나라의 것을 보는 것이다. 허나 여행의 '여(旅)'는 나그네. 즉, 나는 철저히 이방인이 되어서 현지에 녹아드는 것이다. 현지의 것들을 보며 인정할 줄 알고 '이건 왜 이래? 틀렸어.' 가 아닌 '다를 수 있구나'를 배우는 과정이 여행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예로 든 게 프랑스 인들이 우리나라의 개고기 문화를 두고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2. 한국사회는 두발자전거와 같다. 페달을 계속 밟아야 한다. 페달 밟기를 멈추는 순간 자전거에서 떨어져 고꾸라지고, 경쟁에서 재개할 수 없다.
(아저씨의 이 의견은 별로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그럼 브레이크를 밟으면 되잖아요? 그게 바로 여행 아닐까요?"라고 하니, 그냥 픽 웃으시고는 할 말 계속하셨다.)
3. 이건 좋았다. 젊은이들이 공무원 시험에 쏠리는 현상을 보고 보통 어른들은 '요즘 젊은 애들은 도전의식이 없어!'라고 하는데, 이분은 '우리 세대가 이렇게 만든 거지. 그래서 젊은 애들 보면 미안해.'라고 하셨다.
4. 내가 마추픽추에 올라갔다가 고산병에 걸려 낮잠만 자고 내려와서 다시 마추픽추에 가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더니 100불짜리 낮잠이니 뭐니 계속 놀려댔다. 또 바뇨스에서 캐녀닝을 했는데 여행사로부터 사진을 못 받았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바뇨스 캐녀닝? 그건 캐녀닝도 아니지. 내가 코스타리카에서 한 캐녀닝은 ~~ (주저리)" 내 이야기의 핵심은 그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기나긴 강의에서 하나 배웠다! 바로 '이렇게 늙진 말아야지 '하는 것. 젊은이들의 경험을 자기의 것과 비교해가며, 그들의 도전을 무시하거나 짓밟는 일이 결코 없어야겠다.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의 어린 주인공은 가식으로 가득 찬 어른들의 세계를 환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 책을 읽을 땐 매사에 불평으로 가득 찬 주인공이 마음에 안 들었다. 내 일기를 다시 읽다 보니, 이때 내 감정이 그 주인공과 비슷했지 싶다. 주인공의 마음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 어른은 되지 말아야지. 정말로.
어찌어찌 아저씨랑 인사하고는 서둘러 이 두 친구에게 어깨동무를 걸쳐 도망 나왔다. 말꼬리를 잡히면 또 다른 강의를 들어야 할지도 몰라!
“얘들아. 너무 힘들지 않았니?”
“맞아요 형. 탈출하고 싶었어요.”
“그래도 너네 대단하더라. 계속 고개 끄덕여주고.”
“하하... 맥주나 먹으러 갑시다.”
래프팅에서 돌아온 경민이 형도 같이, 넷이서 쿠스케냐를 건배했다. 페루 어느 시골 마을, 한국 남자 네 명. 조금은 적적하고 대화도 계속 끊기지만 그래도 우리는 여행 중이고 마추픽추에 가는 중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는 이 곳, 산타마리아에서의 밤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