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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Apr 18. 2017

#19 태양신의 후예가 되어

페루 - 마추픽추 트레일

오늘은 하루 종일 트레킹이다. 걷는 중간마다 휴식지에서 가이드가 재밌는 것들을 알려줬다.


1월 24일

남미 사람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정글 트레일은 이렇게 안데스 산새를 따라 마추픽추가 있는 곳까지 쭉 걷는다. 잉카인이 되었다는 기분으로 트레킹하고 안데스를 느끼다 보면 어느새 다음 목적지에 도착 해 있다. 중간 쉼터인 몽키 하우스에 살고 있는 이상한 원숭이. 사람들이 가진 것을 마구 뺏어간다. 파란색 CIELO 물통을 특히 좋아한다. 물통을 뺏어서 손으로 뚜껑을 돌려 열더니 마시진 않고 물을 모두 땅바닥에 쏟아 버린다. 요물이다.

몽키 하우스에서는 뱀술 맛도 보고 커피 향도 맡고 코카잎도 씹고 천연 색소를 이용해 잉카 분장도 해본다. 남미 여행 1달 반, 피부가 까맣게 타고 수염이 꽤 자랐다. 분장까지 하니 영락없는 잉카인이 되었다.


고산병에 특효약이라는 코카잎을 씹었다. 10분은 씹어야 효과가 난다고 한다. 그럭저럭 씹고 있는데 뱀술 시식을 해보라 했다. 으웩! 뱀술이 너무 독해서 씹고 있던 코카잎과 함께 바로 뱉어버렸다. 트레킹 시작하는 날부터 끝까지 술을 달고 다녀서 늘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라 있던 이탈리아 친구는 예상대로 뱀술을 구입했다.

쉼터를 지나 또다시 시작된 트레킹. 가는 길에 파인애플 가게가 있었다. 경민이 형이 하나 사더니 너무 맛있게 먹길래 고민하다 나도 하나 사 먹었다. 큼직하게 슬라이스 된 파인애플이 개당 1 솔이다. 사실 쿠스코 시장에 가면 파인애플 한 통을 2 솔에 구매할 수 있기에 엄청 싼 가격은 아니다. 그런데 맛만큼은 비교 불가능이다. 고된 트레킹 중에 먹어서 그런가, 한입 베어 물 때마다 시원하고 단 물이 많이 나왔다.

날이 좋아서, 날이 적당해서 (..죄송합니다) 웃통 벗고 트레킹 했다. 으악. 난 이제 한국 국적 포기!! 여행에서 만큼은 그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고 싶지 않다.

점심 먹는 곳에서는 콜라가 너무 비쌌다. 개당 5 솔(약 1800원)! 인생이 휴가지 아저씨께서 2인당 1개씩 콜라를 사 주셨다. 어제는 말 많아서 꼰대라고 미워했는데 콜라 사주시니까 또 기분이 좋다. 헤헤. 내가 제일 간신배다. 스파게티 양이 좀 적었는데, "더 먹을 사람?"이라고 묻는 아주머니의 말에 염치 불고하고 손을 번쩍 들었다. 한번 주면 정 없는 거라며 두 번이나 떠서 주셨다. 덕분에 배부르게 먹었다.

점심식사 이후에는 낮잠을 잤다. 강아지 옆에 누워서 배낭을 베개 삼아 한바탕 자고 일어났다. 바닥이 딱딱해서 허리가 좀 배기긴 했지만.


작렬하는 페루의 태양을 맞으니 잉카인이 왜 태양신의 후예들인지 조금 알 것 같네, 그런 생각을 하며 걷는데 어느덧 다큐에서 본 도르래에 도착했다. 물살이 거친 우루밤바 강을 건너는 도르래 말이다. 마추픽추 탐사에 최초로 나선 하이럼 빙험은 이 물살을 이기기 위해 통나무 다리를 설치했다고 전해진다.  아무튼, 여기를 건너려면 인당 5 솔씩을 내야 한다. 놀이기구 느낌이 날 줄 알았는데 한 5초 흘러가니까 끝났다.

계속 이렇게 줄을 당기신다. 생활 근육 엄청날 것 같다.

온천까지 마치고 오늘 묵을 숙소에 도착해서 쉬려는데 어디서 깊은 뱀술 냄새가 났다. 곧이어 뱀술을 구입했던 그 이탈리아 친구가 방 앞으로 다가왔다. 개코네!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이 냄새는 뱀술보다 훨씬 강렬하다.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가 봤다. 내 가방 안에 바나나가 전부 썩어서 터져있었다. 아.. 마추픽추 오르면서 먹으려고 아껴둔 건데.. 쿠스코로 돌아가면 가방부터 빨아야겠다.


1월 25일

언젠간 가겠지 푸른 이 청춘

트레일 셋째 날. 아침 일찍 짚라인을 탔다. 3km를 다섯 번에 나누어 구간구간이 짧다. 마지막 라인에서는 스파이더맨 자세, 즉 거꾸로 매달려 가는 자세로 탔는데 가이드가 줄 가지고 왔다 갔다 장난칠 때는 정말 무서웠다.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게 아쉽다. 그리고 대망의 기찻길! 세 번째 걷는 길인데 역시! 지루하다.

가는 길에 찬규와 현진이에게 내가 본 마추픽추 다큐 이야기를 해줬다. 마추픽추의 진짜 건설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이걸 소재로 이야기를 쓰면 재밌겠다. 이 기찻길을 걸으며 이번 여행의 목표 중 하나였던 소설 쓰기의 영감이 생각났다고, 나중에 소설 나오거든 꼭 사인받으러 오라고 했다.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하시는거 어때요? 거기 팬사인회 많이 하던데."

"나는 그 정도 급은 아니고, 의정부 영풍문고 정도..?"

"하하."

의정부 영풍문고는 내가 군인 시절에 휴가 나올 때마다 들리던 좋은 서점이다. 거기서 글쓰기 관련 책을 고르며 작가가 되고 싶다 라고 막연하게 설렜던 기억이 떠올라서 그랬다.

쿠스코 (오얀따이땀보)와 마추픽추 (아구아 칼리엔테스)를 잇는 고급 기차. 나중에 나이가 들고 돈은 많지만 시간의 여유가 없을 때, 그때는 저 기차를 이용하게 될까? 평생 이용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잠시 후 드디어 3시간을 모두 걸어 애증의 마을 아구아칼리엔테스에 도착했다. 이번 숙소는 심지어 와이파이도 된다. 그런데!

아구아칼리엔테스로 오는 기차의 종착지.
정전이다.

갑자기 숙소 불이 꺼져서 나가보니 마을 전체가 정전이 되어 있었다. 원래 우기에 폭우가 내리치는 지역인데 번개에 맞은 것 같았다. 씻을 때도 핸드폰 손전등을 켜고 씻어야 했다. 충전 못한 내 핸드폰은 어쩌지? 식당 내부도 모두 정전이 되었다. 쿠스케냐 병에 초를 꽂아두고 촛불을 켜서 음식을 먹었다. 오. 은근 낭만적이다. 신기한 경험을 했으니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실제 밝기는 이정도인데
DSLR을 잘 만지니 이정도 밝기까지 사진이 나온다.

밥 먹고 돌아오는 길에 숙소 앞 담벼락에 앉았다. 쿠스코에서 출발한 기차가 도착하는 이 곳. 이 시간엔 더 이상 열차가 오지 않는다. 오지 않을 기차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정전된 마을을 바라봤다. 두 다리를 기찻길에 걸터앉고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 소리, 창틀에 비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탕, 탕, 타당, 탕.

쿠스코에서 심심할 때 응답하라 1988을 보며 울곤 했다. 그래서인지 머릿속에서 김필이 부른 <청춘>이라는 노래가 떠나질 않는다.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 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가고 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손 짓에 슬퍼지면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 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거야


2017년 4월 18일

Epilogue

여기는 우리 동네 카페다. 모처럼 중간고사가 일찍 끝나 화수목금을 놀게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이곳 소하2동에 얼마 전 스타벅스가 오픈했다. 내 단골 카페에는 손님이 확 줄었다. 괜시리 마음이 아프다. 커피맛이 스타벅스가 더 맛있고 분위기가 더 좋더라도 억지로라도 가지 말아야지.


신기하게 오늘도 비가 쏟아진다. 이런 날 내 자리는 당연히 창가다. 남미 여행기를 쓸 땐 <청춘>을 반복재생 시켜놓곤 한다. 남미의 작은 마을에서 듣던  그 빗소리와 음악이 여행기를 쓰는 지금도 동일하게 이곳에 울려 퍼진다. 1년도 더 지났지만 남미에서 순간이 <청춘>과 함께 뮤직비디오 흐르듯 생생하게 눈 앞에 재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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