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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Apr 20. 2017

#22 티티카카호에 해가 뜨면

페루 - 푸노(Puno) / 볼리비아 - 코파카바나(Copacabana)

하늘 아래 첫 호수

새벽 다섯 시 반, 푸노 터미널에 도착했다. 꿀잠 자긴 했는데 우려했던 대로 우산을 두고 내렸다. 뉴욕에서 5불이나 주고 산 건데.. 그래. 나랑 같이 1달 있었으면 꽤 오래 버틴 거다. 잘 가라 우산아! 우비가 있어서 다행이다. 터미널 바로 옆에 드넓은 티티카카 호수가 있다.


티티카카 호수는 해발 3000미터가 넘는 곳에 바다처럼 자리 잡고 있어서 '하늘 아래 첫 호수'라는 별명이 있다. 호수 가운데에 있는 '태양의 섬'은 잉카 제국이 태동한 곳으로, 잉카의 시조 망꼬까빡이 태어난 곳이다. 잉카에서 우주 창조의 신으로 숭배하는 비라코차가 황금으로 만든 창을 던져 떨어진 곳이 세상의 배꼽이라는 전설이 있었다. 망꼬까빡이 계시를 받고 이동한 게 바로 쿠스코였고 거기에 도읍을 정해 잉카 제국이 시작된다. 

반면 볼리비아에게는 슬픈 역사적 상징이다. 원래 볼리비아는 태평양을 접하고 있는 나라였는데 칠레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영토의 절반 가량을 잃게 된다. 바다로 가는 길을 잃고 내륙 국가로 전락한 것이다. 언제 다시 땅을 되찾을지 몰라 해군을 양성하고 있다는데 그 훈련을 하는 곳이 바로 티티카카 호수다. 


2016년 1월 29일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입니다만..

운 좋게 내리자마자 해가 뜨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남미에서 바다는 한 번도 못 가본 탓인가 바다같이 느껴지는 이 거대한 호수 앞에서 그저 '좋다'는 표현밖에 하지 못했다.

푸노에 왔으면 우로스 섬 투어가 기본이다. 우로스 섬 투어는 약 20페소. 쿠스코에서 돈을 너무 많이 쓴지라 아껴야 되던 참이어서 과감하게 포기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후회된다. 우로스 투어를 포기한 이유는 단순히 돈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처음엔 낭만을 갖고 우로스 투어를 알아봤다. 갈대를 쌓아서 만든 인공 섬이라니! 그런데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후기가 워낙 '원주민의 관광 상품화가 안타깝다', '생각보다 별로' 이런 거 위주였다. 결국 직접 가보지 않고 섣부른 판단을 내렸다. 아. 가봐도 그냥 그렇겠구나.


가볼걸 그랬다. 누군가의 의견이 아니라 우로스 섬을 향한, 거기 원주민을 향한 나의 주관적인 생각 하나쯤은 가지고 갈 걸 그랬다. 그래야 거기 별로다, 혹은 거기 좋다, 말할 수 있을 텐데. 아무튼, 투어를 하지 않았으니 곧바로 볼리비아 땅인 코파카바나로 넘어가는 버스표를 샀다.


아침 7시 버스를 탔다. 국경 넘기는 간단하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페루 OUT 도장, 볼리비아 IN 도장을 받으면 뚝딱, 끝이다. 드디어 남미 여행의 종착지이자 하이라이트 격인 볼리비아에 도착했다.

국경에 있던 페루 마크. 저 동글이는 나스카라인을 본따 만든거 같은데, 이 디자인 정말 잘했다.


회사 짤리고 왔어요 하하하.

원래는 코파카바나에서 1박 후에 태양의 섬 투어를 제대로 하고 라파즈로 넘어가려 했다. 그런데 웬걸, 들어가는 호스텔마다 방이 없단다. 여기는 체제가 좀 다른 것 같은데 몇 인실 기준이 아니라 몇 명 기준으로 손님을 들인다. 하나같이 1명을 위한 방은 없단다. 1시간 넘게 방 구하기에 실패해서 그냥 오후 태양의 섬 투어를 신청했다. 투어 시작이 1:30인데 예약 시간이 1:19였으니까 점심 먹을 새도 없이 달려갔다. 5 볼짜리 감자칩 하나 사들고. 호수 물 색깔이 정말 예쁘다.

같은 배에 한국분들이 좀 계셨다. 한국어로 막 대화하시는데 모르는 척 가만히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서 "저기.. 남미엔 어떻게 오셨어요?" 여쭈어보니 화들짝 놀라신다. "어머, 한국인 이셨어요? 난 중국분인 줄 알았네." 그래 뭐. 나 한국사람으로 안 보는 거 한 두 번 있는 일도 아니고.


먼저는 초등학생 딸 두 명과 함께 온 4인 가족이 있었다. "아이들 방학 맞아서 휴가 내서 남미에 오셨겠네요." 여쭈어보니 "호호호. 아니요. 남편이 회사 짤린 기념으로 다 같이 왔어요." 이 말을 어쩜 이렇게 유쾌하게 하시는지, 이 가족은 분명 행복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또 다른 한 분은 직장을 관두고 돈이 떨어질 때까지 여행 중이라는 30대 누나였다. 나와 비슷한 감정을 많이 지나오셨다. 여행이 계속 즐겁지만은 않다고 한다. 일례로 10일 동안 동행한 어느 언니와 헤어졌는데 그 뒤에 찾아오는 그 공허함이 그렇게 싫었다고. 내가 쿠스코, 쿠스코에서 만난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떠나보낼 때의 느낌과 비슷하려나. 그런 게 누구에게나 있나 보다.

태양의 섬 투어는 약 4시간인데, 그중 2시간은 왕복 배 시간이다. 특별한 게 있다기보다는 잉카가 태동한 곳, 상쾌한 공기, 맑은 물이 마음에 들었다. 코파카바나로 돌아오니 6시였다. 아무 정보도 없지만 직감상 여기 남느니 라파즈로 떠나는 게 좋다는 느낌이다. 장기 배낭여행을 하다 보니 이런 종류의 감이 대충 생겼다.

라파즈 가는 버스 안에서 해 지는 티티카카 호를 바라봤다. 예쁜데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 티티카카 방문이었다. 하늘과 맞닿은 호수라는 별칭에 걸맞게 바로 위에 떠 있는 구름도 완벽하다. 


마음속에서 고향 같은 쿠스코를 잊으려니 별 생각이 다 든다. 다시 진짜 여행이 시작됐구나, 나그네의 길 말이다. 사실 쿠스코에서 푹 쉬면서 시내 곳곳을 천천히 돌아다니고 현지인들이랑 시장 밥 먹는 게 더 여행 같았지만. 참! 버스가 배에 올라타서 호수를 건너는 경험을 해본 적 있으신지. 이거 참 신기하다.

잠에서 깨니 어느덧 산 위로 금빛 불빛이 반짝이는 라파즈에 도착했다. 무서웠다. 길을 조금 걸으니 노숙자들이 쫙 깔린 곳이 나왔다. 여기로 더 갔다간 죽겠지 싶어서 반대로 갔다. 호스텔 가격들이 90 볼, 100 볼, 110 볼.. 어마어마하다. 다행히 '100배 즐기기'에 where to stay가 떠올랐고 길을 물어물어 Adventure brew hostel에 도착했다. 밤늦게까지 시끄러운 파티 호스텔이지만 와이파이도 되고, 맥주도 공짜로 한잔씩 주니까 괜찮다. 이런 파티 호스텔에는 동양인들이 없는 게 좀 아쉽긴 하다. 백인들의 세상에 끼기엔 아직 나도 내공이 모자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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