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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Apr 19. 2017

#21 세상의 배꼽을 떠나던 날

페루 - 쿠스코(Cuzco)

느긋하게 일어나서 느긋하게 아침 먹고 느긋하게 샤워하고 느긋하게 책을 읽었다. 쿠스코를 사랑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닌가 보다. 3박 4일 정글 트레일에 함께한 사람들과는 마추픽추에서 작별 인사를 했다. 쿠스코에는 또다시 나 혼자 남았다. 그런데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2주 내내 머문 미라도르시토 호스텔 주인 미옐아저씨랑도 친해졌다. 특히 그 아들 케빈 녀석이랑 티격태격하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간다. 쿠스코에 다시 돌아오자 케빈은 "형이 또 올 줄 알았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반겨줬다. 사실 나보다 내 아이폰을 더 반가워했던 거 같긴 하다.

케빈이 방에서 한참 낮잠 자는 나를 깨우더니 DSLR을 뺏어갔다. 내 사진을 억지로 찍어주고는, 자기도 찍어달라 해서 찍은 사진이다.

케빈은 이제 겨우 15살, 사춘기 소년이다. 아마 방학을 이용해 아버지의 일을 도우러 호스텔에 와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청소, 잡일을 도맡아 한다. 중2병의 특징이 아주 잘 드러나는데 가끔 짜증 나긴 하지만 내 눈에는 동생 같이 귀엽다. 예를 들면 내 아이폰을 뺏어가서 1시간째 페이스북을 한다던지, 갑자기 내 이름을 검색 해 보라 해서 해줬더니 친추를 걸더니 로그아웃하고는, 내 걸로 로그인해서 자기 사진에 좋아요를 누른다던지. 같은 반 여자애 사진을 보여주며 예쁘지 않냐고, 자기 심빠띠꼬 하다느니 (매력적이고 인기 많다는 소리), 씸빠띠꼬 하다고 인정 해 주지 않으면 아이폰을 돌려주지 않겠다느니.


혼자 상상을 해본다. 15살 아이의 방학에는 보통 또래 친구들하고 어울려 놀러 다니지 않나? 그치만 호스텔에서 일을 도우며 세계 각국의 사람들을 만나는 경험도 나쁘지는 않겠구나. 유독 케빈에게 엄격한 미옐아저씨를 보며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하다. 허허. 케빈아 형은 너의 미래를 응원한다!


2016년 1월 27일

세상 참 좁죠?

읽던 책이 지루해졌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파비앙에 잔금을 치르러 갔다. 187 솔을 더 내야 했는데 현금이 178 솔밖에 안 남아서 9 솔을 깎아달라고 졸랐다. 안 된단다. 역시. 파비앙은 블로그 입소문을 탄지라 한국인 관광객을 많이 상대해 봤겠지? 나의 애교 정도는 가볍게 넘기며 "No~" 하셨다. 기분 나쁘지 않은 No였다. 모자란 돈을 뽑으려 ATM으로 가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보고타에서 만난 일본 친구 타로였다!


우리의 주된 대화 언어는 스페인어. 타로는 과테말라에서 스페인어 수업을 듣고 남미 여행 중이었기에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됐다. 나는 스페인어가 짧은데 신기하게 말은 통했다. 뭔가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 예를 들면 "마추픽추에 모기가 많아서 모기 퇴치제가 있으면 좋긴 한데 없어도 긴팔, 긴바지를 입으면 되니 꼭 필요한 건 아니다"는 일본어와 영어를 섞어서 말했다. 하하! 나 아직 죽지 않았구나. 타로와 같이 싼뻬드로 시장에 가서 5 솔짜리 로모살타도를 먹었다. 로모살타도는 소고기와 야채를 볶아 감자튀김과 함께 밥 위에 얹은 페루 대표 서민 음식이다. 우리 입맛에도 아주 잘 맞는다. 위에 계란 프라이를 얹으면(꼰 후에보) 1 솔이 추가된다. 시장 음식은 레스토랑에 비해 양은 2배고 가격은 절반이다. 물론 맛은 레스토랑이 좀 더 좋지만 시장 것도 나쁘지는 않다. 게다가 시장에는 피클 같은 새콤한 야채들이 테이블 위에 구비되어 있다. 사실 그냥 로모살타도만 먹으면 좀 느끼하다.

이렇게 푸짐한 소고기 요리가 2500원밖에 안한다.

옆자리 꼬마애가 우리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더니 밥은 안 먹고 우리를 보며 연신 까르르 웃어댔다. 한 5분 웃었나? 하여튼 거의 우리가 떠나기 직전까지 웃고 먹고를 반복했다. 이상하네. 우리 얼굴에 뭐가 묻었나?

구운 바나나를 파는 현지 상인과 타로, 그리고 지나가던 아저씨.

내일 마추픽추에 갈 계획이라는 타로에게 파비앙을 소개해 줬다. 여기가 제일 싸다고. 마침 나도 잔금 치르러 가는 길이니 같이 가자고 했다. 파비앙에게 자랑스럽게 "친구 데려왔어요~ 좀만 깎아주면 안돼요?" 하니까, 방긋 웃으며 187 솔 중에 깔끔하게 180 솔만 내란다. 오! 7 솔이면 시장에서 밥을 한 끼 먹는다. 고마워요 파비앙!


같이 시장에서 디저트도 먹고 타로의 호스텔로 놀러 가서 쿠스케냐를 건배했다. 호스텔에 돌아오니 벌써 저녁 6시 반이다. 호스텔에 내일 마추픽추로 가는 한국 분들이 와 계셨다. 저녁식사를 같이 했는데 무려 고추참치, 신라면을 나누어 주셨다! 오랜만에 먹으니 무지 맵지만 반가운 맛이었다.


1월 28일

굿바이 내 마음속 황금도시

드디어 쿠스코를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떠나기 귀찮은 것도 있었지만 사실 정글 트레일 다녀온 후 돈이 좀 모자라서 발이 묶여 있었다. 급하게 5명의 친구들에게 카톡을 했다. 내가 지금 페루 미아가 되게 생겼는데 좀 구해달라고. 3만 원이면 된다고. 5명 모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돈을 꾸어줬다. 그중 한 명은 심지어 "나한테 이런 부탁을 할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좋다"라고 했다. 너무 고마운 친구들! 좋은 기념품 사다 줘야지. (마추픽추가 그려져 있는 Peru 스타벅스 텀블러를 주었다. 다들 너무 좋아했다.)


오전에 잠 좀 푹 자려 했는데 7시 반에 케빈이 아침 먹으라고 깨운다. 항상 내가 제일 먼저 일어나 아침을 먹긴 했지만, 얘가 웬일이래.. 졸려 죽겠는데. 올라가 보니 아직 빵 아줌마는 오지도 않았다! (이 호스텔은 아침마다 빵을 팔러 돌아다니는 아주머니에게 빵을 사서 손님들에게 아침밥으로 제공한다.) 왜 빵이 없냐고 따지니까 아이폰을 넘겨주면 빵을 주겠단다. 요 나쁜 자식. 폰을 주고는 강형이 남기고 간 소시지, 바나나, 잼과 빵으로 배부르게 아침을 먹었다.

샴푸, 바디워시, 치약을 사기 위해 ORION마트로 갔다. 오리온은 대형마트로 식품류가 굉장히 저렴하다. 근데 생필품은 좀 비쌌다. 이런 건 오히려 주변에 있는 Pharmacy에서 싸게 판다. DSLR용량도 꽉 차서 USB를 구입하려고 쿠스코 시내를 다 돌아다녔다. 2주 있으면서 안 가본 곳이 이렇게 많았구나, 새삼 느꼈다. 8GB USB가 보통 27-35 솔이었는데 어느 가게에서 20 솔에 팔길래 바로 겟! 기분이 좋아졌다. 점심으로는 어제 먹은 싼뻬드로 시장의 로모살타도. 맛있어서 저녁까지 테이크아웃했다.

자기 근육을 보여주며 "심빠띠꼬!"(멋지지?) 하다고, 사진을 찍어달란다. 영락없는 중2병이지만 은근 귀엽다.

쿠스코를 떠나자니 아쉬워 죽겠다. 길가 어디서나 비슷한 톤, 목소리로 "맛사지, 아미고 맛사지?"하며 쿠스코 관광 마사지를 권유했던 사람들. 호스텔 가는 길의 가파른 언덕, 원주민들이 키우는 귀엽고 순한 아기 야마들, 거리에서 끊이지 않는 음악, 황금 도시의 전설이 살아나는 야경, 쿠스케냐. 모든 것이 그리워지겠지? 케빈이 내 폰을 쓰는 동안 나는 리셉션 소파에 누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마저 읽었다.

괜히 이 책을 읽어서는 한 친구랑 삶이 가벼워야 할지 무거워야 할지를 두고 한참 카톡으로 대화했다. 이 친구는 "타인의 삶이 가벼운지 무거운지도 그들의 겉모습만 본 그대의 속단이 아닐런지."라는 명쾌한 답을 내려줬다.


원래 9시쯤 광장에서 터미널행 버스를 타고 가려했는데 어느 한국분이랑 택시를 같이 타기로 했다. 시간이 좀 남아서 스타벅스에 앉아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돈 계산을 해봤다. 루레나바께에 갈 돈이 될까 안 될까 그것만 계속 고민했다. 아끼고 아끼면 가능할 것 같기는 한데.. 한번 도전해보지 뭐!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푸노행 버스가 지금 막 출발한다며 25 솔에 티켓을 팔고 있었다. 터미널세가 있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타니까 그거도 안 냈다. 버스에서 잠이나 푹 자야겠다.

굿바이, 마음속 고향, 세상의 배꼽, 쿠스코.

쿠스코에서 제일 크고 저렴한 San Pedero 시장
미라도르시토 2층. 저 소파에 누워서 책을 읽고 있으면 케빈이 다가와서 내 아이폰을 가져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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