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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Apr 20. 2017

#23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밑천인데

볼리비아 - 라파즈(La Paz)

브류 호스텔의 아침 식사는 팬케익이 나온다. 맛없지만 꾸역꾸역 먹었다. 한국에 있는 친구랑 카톡 하는데 자기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현실을 택하는 거 같단다.

"너 너무 나이 든 거 아니야? 우리 나이엔 현실보다 이상 아닌가?" 했더니

"너도 옳고 나도 틀리진 않아."라고 했다. 우문현답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의 문제다.

2016년 1월 30일

볼리비아야 나한테 왜 그래..

씻고 나서 숙소를 옮겼다. 4인/6인 도미토리가 30 볼(약 5,000 원) 밖에 안 되는 intiwasi 호스텔이다. 새로운 호스텔 로비에 한국인 두 분이 앉아계셔서 오늘 일정을 물으니 킬라킬라 라는 전망대에 야경을 보러 갈 계획이라고 했다. 잘됐다 싶어 동행하기로 하고 5시 반에 약속을 잡았다.

라파즈 시내도 천천히 둘러볼 겸 호스텔 뒤쪽의 Negro시장에 갔다. 주로 원주민 복장을 한 분들이 물건을 팔고 계신다. 그냥 좋았다. 뭘 사지 않아도 이것저것 구경하는 게 재밌다. 그 유명한 마녀 시장도. 마녀 시장은 원주민들이 주술에 쓰는 여러 도구를 파는 곳이다. 좀 음산한 기운은 있다. 여기서 사진 잘못 찍으면 큰일 난다.

밥을 먹기 위해 어느 닭고기 집에 앉아 주문을 했다. 둘러보니 닭이 그려진 간판이 너무 귀엽길래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앉아 계시던 할머니가 의자를 밀치고 나와서 내 카메라를 막 뺏으려고 했다. 멱살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카메라를 막 잡아당기는데, 나도 안 뺏기려고 안간힘을 썼다. 내 힘이 못 이길 정도다. 그 와중에 "경찰(Policia)"이 명확하게 들렸다. 이 사진을 당장 지우지 않으면 경찰을 부를 거다 이놈아!! 대충 이런 내용인 것 같았다. 경찰 경찰 하니까 갑자기 내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구경을 한다. 도와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일단 사진 지우는 걸 보여줬다. 그러자 할머니도 카메라를 놓았다. 원주민들 중에는 사진이 영혼을 빼앗아간다는 소문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던데 혹시 그런 거였을까?


이 순간이 진심 무서웠다. 이후로 볼리비아 여행 내내 시장 통에서는 사진기를 못 꺼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시장 중심의 정육가로 들어가서 밥을 시켰다. 수프+고기덮밥을 먹었다. 방금 전 상황을 곰곰이 곱씹어봤다.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되는 게 그들의 문화라면, 그걸 몰랐던 나의 잘못이 맞다. 나는 어쨌든 이 나라에 손님으로 온 거니까. 그래도 너무 무서웠다.

숙소로 돌아와서 침대에 누웠는데 아까 그 무서움이 한순간에 타지에서의 외로움으로 변했다.

마녀시장 명물, 박제된 야마.

볼리비아는 남미 중에서도 경제 소득이 낮고 원주민 비율이 상당히 높다. 안타까운 것은 원주민들의 소득이 대부분 하위층을 이룬다는 사실이다. 압제의 역사 속에서 살아남았지만 여전히 현실은 고달파서일까, 이들의 얼굴에서 미소를 찾기 힘들었다.


평화의 마을에 내리는 비

외로운 감정도 낮잠을 푹 자고 일어나니 사라졌다. 하하. 나는 원래 좀 쿨하다. 금방 우울했다가도 금방 기분 좋아진다. 약속대로 세 명이서 깔리깔리로 갔다. 버스비는 한 번에 1.5 볼이다. 깔리깔리는 라파즈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인데 해질 때 가야 장관을 볼 수 있다. 우리는 해가 질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잠시 뒤, 저 멀리서 먹구름이 몰려왔다. 산 위의 마을에는 이미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라파즈는 정말 산 꼭대기까지 빽빽하게 집들로 채워져 있다. 우리나라 달동네처럼 위로 올라갈수록 가난한 사람들이 산다. 갑자기 슬프다. 산 꼭대기는 비도 가장 먼저 맞고, 해도 가장 빨리지고, 산소도 가장 적지 않나? 하늘 아래 첫 수도라는 라파즈. La paz의 뜻은 '평화'이지만 슬픈 역사와 함께 힘겹게 살아가는 원주민들의 모습은 그 이름과 모순이다.


해가 지니까 비는 오고, 바람도 불고, 무지하게 추웠다. 그래도 기다려서 본 일몰은 그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는데 한국 어르신 다섯 분이 올라오셨다. 케이블 카를 찾으시던데 아무래도 여긴 아닌 거 같았다. 원주민 st 내 패션을 보시더니 멋지다, 혼자 남미 여행하는 거냐, 부럽고 대단하다고 하셨다.

"에이, 어머님들이 더 대단하시죠. 저도 남미 다니기 힘든데 어르신분들은 얼마나 더 힘드시겠어요." 하니

"이때가 아니면 못 올 것 같아서."라고 하셨다.

저 멀리 달의 계곡이 보이길래 같이 온 동현이한테 "오. 달의 계곡은 안 가고 여기서 봐도 되겠다."라고 했더니 "입장료도 있던데? 15 볼인가 20 볼인가."

"오. 그 정도면 밥 한 끼인데?"

우리 대화를 듣던 어르신들이 귀여운지 피식하셨다. 택시 타고 돌아다시는 걸 보니 확실히 나이 들어오는 여행은 돈이 많기에 질도 높아지나 보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젊음'을 갖고 있다. 좀 오그라드는 멘트긴 한데..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젊음이 있으니까 괜찮다.


돌아오는 길에는 대통령 궁에 들러서 호위병들이랑 사진도 찍었다. 옆 골목에 가판대들도 구경했다. 피겨, 케이스, 향수 등등. 재밌는 물품이 많다. 사실 난 이전까지는 이런 거에 별 관심 없었는데 이 둘이 너무 재밌게 선물 고르는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재밌어졌다.

길거리 시장통에 앉아서 9 볼짜리 아사도(밥+감자+얇은 소고기)를 먹었다. 돌아가는 길에 곱창처럼 생긴 음식도 나누어 먹었다.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여쭈어보니 역시 안된단다. 마무리로 맥주 한 병씩을 사서 호스텔에 들어와 건배를 했다. 페루 이후로 거의 1일 1 맥주 한 거 같다.


으아! 이런 무계획적인 하루, 너무 좋다. 내일도 무계획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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