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대가리 Jun 08. 2017

성실

저녁 6시 52분. 시험 칠 준비를 마쳤다. 모든 범위의 ppt를 한 번씩 숙지하고, 과제로 나온 연습문제를 다 풀어보고, 솔루션을 다 외웠다. 끝까지 안 외워지는 공식들을 적어놓은 노트를 손에 끼고 머릿속에 주입하며 중앙도서관을 나왔다. 시험 전에 달달한 걸 먹으면 기억력이 좋아진다던데 수능 이후로 효과를 본 적이 없다. 더는 속지 않는다. 그냥 전날에 잠을 많이 자면 된다.



7시 2분. 입실이 2분 늦었다. 시험장에 열을 맞추어 늘어선 학생들은 이미 문제지를 받고 빠른 속도로 답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짜여진 열의 비어있는 저곳,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 서둘러 앉았다. 문제지를 받았다. 방금 전까지 외우고 있던 그 복잡한 공식을 문제지에 적었다. 그리고 1번부터 5번까지, 문제를 한번 스캔했다. 역시나. 그 복잡한 공식을 쓰는 문제는 출제되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 전반적인 난이도가 어려워 보이지는 않는다.


평소 시험과 다름없이 준비된 답안을 써 내려갔다. 2시간 뒤, 이 시험장을 나가는 순간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 억지로 기억해 낸다고 해서 기억나지도 않을 답 말이다. 그렇다면, 3달에 걸쳐 수업 듣고 약 1주일간 억지로 잠을 참아내며 피 터지게 공부한 시간들은 다 이 한 순간을 위해서였단 말인가? 아니다. 이 시험이 끝나면 그 결과물은 알파벳의 하나로 내게 돌아온다. 꼬리표가 되어 돌아온다. 그 보복이 무서웠다.


공학으로 어떻게 이 사회에 정의를 실현할까? 학교에서 그런 건 가르치지 않는다. 개나 주라고 한다. 그런 거 고민할 시간에 코딩 하나라도 더 공부하면 조금 더 유용한 인재가 될 거라고 가르친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학점 좋은 사람이 똑똑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교수님께 여쭈어봤다. 학점이 낮아도 괜찮나요? 학점이라는 거는 이 사람이 하기 싫은 것도 하는지, 성실한지를 보기 위한 척도라고 하셨다. 학점이 낮아도 괜찮단다. 능력을 증명할 수 있으면. 


망할. 대부분 학생들이 그 능력을 증명할 수 없으니까 이렇게 죽어라고 학점에 매달리는 거 아닌가.

3번 문제를 아무 생각 없이 암기한 공식에 대입해서 기계적으로 풀고 있을 때쯤, 떠올랐다. 난 공학자로서의 인사이트도 없고, 이 전공을 살릴 생각도 없는데 왜 이걸 이렇게 열심히 판 거지? 4년 동안 난 뭘 한 거지?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게 뭐지?


아. 하기 싫은 것도 꿋꿋이 해내는 성실성을 몸소 증명해 보였구나. 나는 성실하다. 망할. 그래. 나는 성실하다. 그 성실함을 보이고 싶어서 이해가 하나도 안 되는 공식 붙들고 죽어라 암기했고 연습문제를 풀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시험장에서 나타난다.


전공 시험이 아직 두 개나 더 남았다. 마칠 때까지 나의 성실함을 몸소 증명해 보여야지. 그 성실함은 무언가 주체적으로 일을 해 나가는 성실함은 아니다. 창의적인 생각으로 내 분야를 개척하는 그런 종류의 성실함도 아니다. 상사의 말을 잘 따르고 시키는 것 그대로 해 내올 줄 아는 사람, 군말 없이 불평불만 없이 까라면 깔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가진 성실함이었다.



자. 여덟 학기 동안 성실함은 충분히 보인 것 같으니, 이제 좀 불성실해볼까?
아. 그런데 방법을 모르겠다. 어떻게 하면 불성실해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회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종류의 과제는 그 어느 ppt에도, 연습문제에도 없었다. 스물여섯이 풀기에는 너무 어려운 숙제다.

작가의 이전글 영화 <미션>과 라틴아메리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