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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Sep 09. 2017

청춘예찬

집을 나서는데 모든 것이 불안했다. 4년 동안 잘 배운 전공 살려 취직할 생각은 안 하고 또 휴학이라니. 게다가 당장 어디에 쓸지도 모를 스페인어를 공부한다니. 이 나이쯤 되면 보통 취업을 했거나 적어도 취업 준비를 하는데 나는 아직  취준의 이유를 찾지 못했다. 철이 덜 든 탓도 있지만 등 떠밀려 사회로 내쳐지기는 더 싫었다. 저번 학기까지 분명 최선을 다해 공학을 공부한 것 같은데 머릿속에 남은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지식으로 어떻게 돈을 잘 벌고 안정적인 삶을 누릴지 가르쳐줄 뿐, 세상을 이롭게 만드는 법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2년 전만 해도 휴학을 꺼리지는 않았다. 그저 하고 싶은 것 하며 사는 게 인생이려니 싶었다. 헌데 취업할 때가 다가오면서 삶이 주는 책임감이 점점 무거워졌다. 그 무게는 무어라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되어 나를 짓눌렀다. 자연스럽게 발걸음은 학교에서 열린 취업박람회의 부스들로 향했다. 이곳저곳을 쭈뼛거리며 “저.. OO는 뭐하는 회사에요?” “공대 학부생이 졸업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죠?” “중남미 쪽으로도 진출을 하나요? 제가 그 지역에 관심이 좀 있어서...” 같은 소심한 질문을 잔뜩 늘어놓았다.

상담을 받다 보니 지금이 하반기 공채 시즌임을 알았다. 내년에 취업준비를 하면 너무 늦어질 것 같기도 하고, 상반기에 쓰자니 뽑는 사람이 적다고들 한다. 그런데 취업준비라곤 해본 적 없는 나는 영어 말하기 시험 점수도 없었다. 이제라도 오픽을 봐야 할까 싶었다. 적성에 맞지는 않지만 일단 뛰어들어 사회생활하다 보면, 그런저런 자리를 찾아 거기에 알맞게 살아가는 재미가 있지 않을까. 내 꿈을 이루어도 가정을 행복하게 일구지 못하면 불행하지 않을까. 꿈이니 뭐니, 너무 거창한 건 아닐까. 꿈을 찾지 못한 채 취업하면 마치 실패한 인생을 사는 것 마냥 내가 너무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건 아니었을까. 어차피 전기전자공학과는 어느 회사든 취업이 잘 되니까 눈 딱 감고 2-3년 일 해볼까. 열린 곳을 다 두드리면 한 군데 정도는 면접을 보라고 연락 오지 않을까.

21살, 전주역에서. 기차 올까 무서워 경직된 다리 근육이 선명하다.

머릿속에서 꿈과 패기를 지닌 A, 책임과 현실을 따지는 B가 싸우고 있었다.

그럼 스페인어 공부는? 중남미는 언제 다시 갈라고?

스페인어는 이제 막 시작한 거잖아? 지금 실력으로 뭘 어쩌겠다고. 그냥 남들처럼 취업 준비해서 회사 다니면서 취미로 공부 해. 그럼 언젠가 기회가 오겠지.

하고 싶은 일도 아닌데 억지로 지원하자고?

그렇다고 해서 너가 지금 특별한 준비를 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언어 공부를 하고 있을 뿐이잖아?

언어 공부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남미를 가서 뭐 어쩌겠다는 건데. 여자 친구는 안 만날 거냐? 여기저기 싸돌아 다니면서 연애하기를 바라는 건 너무 염치없지 않니?

난 그냥 중남미가 좋아. 물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해야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가끔 외로워도 어쩔 수 없어.

이상주의자 납셨네. 그냥 ‘좋다’잖아. 국제학 전공하고, 스페인어 전공 한 사람들을 너가 이길 수 있겠어? 실질적으로 남미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알아보긴 했니?

아니.. 그래도 난 중남미가 좋고, 스페인어도 재밌는걸.

어휴. 답답해. 그냥 눈 딱 감고 영어 시험 보고, 입사 원서 넣어봐. 된다는 보장도 없잖아. 일단 찔러보는 게 어때?

난 아직.. 잘 모르겠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내가 이유 없이 가장 좋아하는 시, 윤동주의 '사랑스런 추억‘이 떠올랐다. 시의 마지막 구절이 항상 가슴을 뛰게 한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있거라.

젊음이 뭔지도 잘 모르던 때에 그냥 그 문구 그대로 좋았던 말. 감탄사며, 쉼표의 위치며, 명령형이며 그냥 모든 조합이 이유 없이 좋은 구절이다. ‘아아’가 빠지면 어색하다. 쉼표를 무시하고 쭉 읽어도 어색하다. 남아있어라? 남아있겠지? 머물러있거라? 그 어느 유사어도 ‘남아있거라’를 대체할 수 없다.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조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떼가 부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 ― 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 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사랑스런 추억」 윤동주     

     

이제 다시 보니 동주는 정거장 플랫폼에 앉아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며, 담배를 태우며, 봄이 오는 거리를 누렸다. 잠시 옛사랑을 회상하며 그리워했다. 회상이 끝나면 봄이 사라지고 눈 앞에 조용한 하숙방이 남아있겠지만 여전히 그리움을 누려도 괜찮았다. 기다리던 이가 오지 않았어도 동주는 그곳에서 젊음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래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수색역의 야외 승강장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감동이 있어서. 당산에서 합정 넘어가는 2호선 철교 위에서 바라본 한강으로 비치는 햇무리의 반짝임에 울컥해서. 반짝이는 햇살이 열차를 따라 이동하는 게 새삼 신기해서. 상암동 MBC 앞에서 악질 노조 퇴장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태극기와 성조기를 휘두르는 어른들을 바라보며 정신줄을 놓고 큰 웃음을 지을 수 있어서. 너무 웃느라 눈 앞에 돌덩이도 못 보고 그대로 콱 박아서 왼쪽 다리에 상처가 나고 부어올라도, 아픈 다리를 이끌고 버스에 올라 30분 동안 서 있는데 뒤쪽에 앉은 젊은 엄마의 품에 누워 조용히 잠든 아이를 보며 아픔도 잊고 미소 지을 수 있어서.

영화 '동주'

수색역에도, 한강 철교에도, 버스에도. 내가 걸어오는 모든 길에 젊음이 남이 있어서 좋았다. 오픽 점수가 있든 없든, 꿈을 위해 달리고 있든 잠시 쉬고 있든, 여자 친구가 있든 없든, 돈이 많든 적든, 꿈이든 현실이든, 패기든 책임이든 이 모든 게 젊음의 정체였다. 가진 것이 아무 거도 없지만 그래서 잃을 걱정도 없는 것이 젊음이었다.


아아, 젊음아! 오픽 공부는 1년을 더 미룰 테니 너는 부디 오래 거기 남아있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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