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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Sep 13. 2017

청춘예찬

장미는 내일보다 오늘이 더 빛났다.

수능이 다가올수록 고3 아이들 수업에서 한숨이 늘어갔다. 반 정도는 막판 뒤집기를 꿈꾸며 놀라운 집중력을 보이고 반 정도는 이제 더 이상 희망 따위 없는 것처럼 넋을 놓고 있다. 수업을 할 때는 바늘 하나 들어가지 못할 만큼 긴장이 꽉 차 있는 기분인데 그 와중에 시덥잖은 농담 한 마디를 던지면 긴장이 싹 무너지고 까르르 웃음이 터진다.


잠시 나의 고3 때로 돌아가 봤다. 그 시절은 참 삭막했다. 우리는 협력하는 법 보다 경쟁하는 법을 먼저 배웠고 반 친구들을 눌러야만 살아남는 혹독한 현실을 체험했다. 어른들은 무언가 비밀을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말해 주지 않았다. 그저 대학 가면 그동안 못 논거 다 놀 수 있으니 공부에 전념하라는 말 뿐이었다. 나중에 공부하려면 어렵다, 공부에도 다 때가 있는 법이니 고등학교 때 죽어라 공부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무슨 힘으로 고3 시절을 버텼더라?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는 상상은 기본이고, 수능 당일날 언어, 수리, 외국어를 모두 1등급 맞는 상상, 캠퍼스 수업에서 예쁜 여자친구를 만나 달콤한 사랑을 나누는 상상 (결국 실패했지만), 참 다양했다.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행복하게 만든 상상은 ‘어른’이 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깔끔한 셔츠에 슬랙스를 입고 한 손에는 커피를 든 채 거리를 활보하는 거다. 이때 커피에는 꼭 ‘슬리브’가 껴있어야 한다. 스타벅스, 탐앤탐스 등 유명한 체인이면 더 좋다.

하나 더 있다. 그 시절에는 새벽 2시, 독서실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있던 술집 테라스의 사람들이 늘 부러웠다. 나도 몇 개월 뒤에는 친구들과 저 자리에 앉아 소주를 시켜놓고 웃으며 떠들 수 있겠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밤새도록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 참자.

이런걸 꿈꿨지. 다만 난 이제훈이 아니었을 뿐.

몇 개월 후, 나는 스무 살이 되었다. 손으로 들고 다니는 커피에는 낭만이 없었다. 겨울에는 따뜻한 커피를 테이크아웃하면 들고 걷기가 어려웠다. 갓 대학생이 됐을 땐 바쁜 일이 많아 걸음이 빨랐는데 커피를 옷에 자주 쏟았다. 애써 장만한 하얀 셔츠에 누런 얼룩이 들어버렸다. 아메리카노는 담뱃재를 먹는 것 마냥 맛이 없었다. 가장 좋아했던 휘핑크림 올린 화이트 모카는 비쌌다. 음료 한 잔이 내 아르바이트 시급을 훌쩍 넘어갔다. 사치는 아무나 부리는 게 아니었다. 커피숍에 앉아 커피 한잔을 시키고 전공 공부를 하면 지성 돋는 대학생 코스프레를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현실은 무거운 노트북과 그거보다 더 무거운 전공책을 두어 권 얹고 나면 꽉 차는 테이블 위에서 유인물을 마구 뒤져가며 복적스럽게 공부할 뿐이었다. 여유롭게 하는 순간 과제의 데드라인을 놓치니, 정작 시켜놓은 커피는 몇 모금 마셨을 뿐인데 이미 얼음이 다 녹아 있었다.


술집의 낭만도 그랬다. 처음 몇 번은 신기했던 것 같다. 하지만 대학을 다니며 경험한 미팅과 온갖 종류의 술자리는 가벼운 인간관계에 대한 허무함만 남겼다. 동기들과의 만남에서도 술이 들어가야만 깊은 속 얘기가 나오는 문화도 불편했다. 수업을 째고 즐기는 낮술은 퍽 낭만적이긴 했으나 흑역사를 남겼다.


현실이 어쨌든 간에 이런 종류의 상상은 고3에게 확실히 먹혔고, 장밋빛 미래를 위해 열아홉의 꽃다운 나이는 잠시 희생해도 되었다. 하지만 그 미래가 상상했던 것만큼 장밋빛이었는지는 미지수다.

대학에 와서도 똑같았다. 4월이 되면 하루빨리 중간고사가 끝나길 바랐고 5월이 되면 차라리 시험기간이 낫다며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과제 폭탄을 직격탄으로 맞아야 했다. 녹초가 된 신입생에게 찾아온 6월의 기말고사는 ‘내려놓으면 마음이 편하다’는 진리,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깨닫게 했다. 공부가 재밌다기보다는 학점을 잘 받고 싶어서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4년 내내 개강과 동시에 ‘아, 종강하고 싶다’를 입에 달고 살았다. 방학에 무얼 할지가 중간, 기말을 버티는 유일한 낙이었다.

스물한살의 봄.

입대를 앞둔 2학년 1학기 기말고사 때는 차라리 군대를 빨리 가고 싶다며 시간을 보챘다. 전공 공부가 죽어도 하기 싫었지만 또 어찌 꾸역꾸역 해냈다. 낭만은 술집과 커피에 있지 않고 시험 전날 잔디밭에 앉아 시켜먹었던 치킨에 있었다. 다 먹고 나면 하지 못한 공부와 날아간 시간에 대한 후회가 물밀 듯 밀려오는 게 함정이다.


입대를 하자 내 인생 목표는 딱 하나가 되었다. 2014년 6월 23일, 전역날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중간이든 기말이든 치킨이든 커피든 술이든 그 시절의 사소한 것들이 참 그리웠다. 불침번을 설 때마다 머릿속에서 어렸을 적 살았던 동네를 그리는가 하면, 전역 후에 계획을 세우며 또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교환학생도 가고, 워킹홀리데이 가서 돈을 많이 모아 세계일주도 하고, 아무튼 남은 20대는 여행으로 꽉꽉 채워야지 했다. 전역하면 머리도 5:5 가르마를 타고 패션에도 좀 신경을 써야지 했다. 하하. 상상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올 때 거울 속에 비친 짧은 머리를 보는 순간 자괴감 들고 괴로운 것이 함정이다.

아무 걱정 없던 그시절


6월 23일이 되었고 전역을 했다. 행복했다. 날아갈 것 같았다. 페이스북에 전역 기념사진을 올렸는데 처음으로 좋아요 100개를 넘겼다.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었고 두려울 게 없었다. 자, 이제 좀 즐겨볼까? 일단 교환학생부터 가자! 싶었더니 교환학생을 가려면 토플 점수가 필요했다. 그 방학을 내리 토플 공부만 했다. 새벽 2시에 잠들고 아침 6시부터 강남 영어학원 가는 버스에 몸을 실어야 했지만 교환학생이 되어 미국에 가 있는 상상을 하며 버텼다. 설상가상으로 군복부 하던 시절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전국 각지로 흩어진 동기와 선임들은 다시 보기 어려웠다. 같이 운동하며 부대끼던 후임들은 부대에 남겨져서 잘 하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연락할 수 없었다. 지난 2년이 한순간의 꿈같았다. 영어공부하느라 죽겠는데 차라리 아무 생각 없이 전역만 바라던 20대 초반, 그때가 행복했지 싶었다. 미쳤지 미쳤어.


인고 끝에 교환학생에 합격해도 문제였다. 돈이 없었다. 1000만 원 넘는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휴학하고 아침 7시부터 패스트푸드 아르바이트를 매일 뛰었다. 저녁이면 과외도 했다. 월수입은 150이 넘어가는데 정작 쓰는 돈은 20만 원이 채 안됐다. 2만 원짜리 옷 한 벌 사는 게 아까울 만큼 자린고비였다. 알바하며 겪은 이 모든 수모는 미국에 가서 해결하리라, 교환학생이 되어 이 억울한 시간을 보상받으리라, 이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교환학생은 대학생이 해볼 수 있는 최고의 경험중 하나이다.

교환학생을 잘 마치고 남미 여행까지 무사히 다녀왔다. 이 시절만큼은 온전히 현재를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일상이 아닌 여행이었다. 6개월이 지나 한국에 다시 돌아오니 나는 다시 미친 듯이 바쁜 삶을 살아야 했다. 교환학생을 다녀오느라 못 들은 전공을 꽉꽉 채워 들어야 했고, 동아리 회장까지 맡았다. 마지막 세 학기는 이것저것 하다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적성에 안 맞는 전공 공부를 하고 있자니 여행하던 시절이 그리웠다. 그래도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현재를 즐길 수 있었던 때였으니까. 졸업하면 꼭 다시 남미에 가야겠다, 아니면 적어도 그 비슷한 일은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또다시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리고 마침내 원하던 때가 왔다. 8학기를 모두 마쳤는데 졸업 신청 시기를 놓쳐서 한 학기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원래 졸업을 늦게 할 생각이긴 했지만 학생 신분으로 남아있는 것의 장점이 그닥 없어 보여서 마지막 학기를 다니게 되었다. 물론 0학점이다. 스페인어 수업 하나만 청강을 하고 있다.


지금 나는 어떨까? 솔직히 말하자면 예전만큼 나를 강렬하게 사로잡는 목표가 없다. 어딜 여행 가야겠다, 돈을 얼마 모아야겠다, 혹은 어느 회사에 입사하고 싶다, 어디에 도전하고 싶다 이런 꿈이 없다. 그냥 월, 수에는 스페인어 학원에 가고 화, 목에는 학교 수업을 청강하며 일주일에 두 번 고3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강사를 하고 있다. 남미에 다시 가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은 있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 얼마를 모아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 계획은 하나도 없다.


여느 때처럼 한가한 수요일. 오후 1시에 학원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기 위해 홍대입구역을 향했다. 문득. 나는 꿈을 잃어버린 걸까? 당장 회사에 가기 싫고 어른 구실 하기 싫어서 이 시간을 유보하고 있는 걸까?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스물여섯 9월의 내 모습은 분명 20대 초중반의 나와 달랐다. 예전의 나는 목표가 생기면 그것만 보고 달렸는데 지금은 일부러 천천히 가고 있었다. 이전이었으면 분명 목표를 높게 잡아 거기에 나를 억지로 맞추기 위해 몸을 혹사시켰을 텐데, 지금은 잠을 푹 자고 건강한 음식을 먹는 게 더 중요해졌다. 예전에는 꿈이 생기면 친구들과 약속을 거의 잡지 않고, 내 시간을 내어주는 일을 극도로 꺼려했는데 지금과 같은 여유가 생기니 연락 않던 친구들에게 먼저 연락해서 약속도 잡고 한다. 연락 없던 군대 동기, 과 후배, 고등학교 친구가 보고 싶어 지면 주저 않고 먼저 연락한다. ‘밥 먹자’는 상투적인 표현에서 끝나지 않고 바로 약속을 잡는다.


헐, 뭐지? 나 늙은 걸까? 꿈이 사라진 걸까?

늙은 게 아니었다. 비로소 청춘의 시간에 올곧이 집중하게 된 거였다. 그렇게 바라던 꿀 같은 휴식의 시간을 누리는 가운데 인생의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거였다. 지금까지 나는 당장 하고 싶은 일을 이루기 위해 단기간의 목표를 두고 달리는 일에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인생은 마라톤이며 단기 목표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음을 알았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 어떤 인생이 성공한 인생일까를 성찰하는 것이 훨씬 중요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이 청춘이 참 좋다. 조급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그려놓은 부분보다 백지로 남은 부분이 훨씬 많기에 원하는 대로 밑그림을 그리고 여러 가지 색칠도 해볼 수 있어서 참 좋다. 그 와중에 막연한 미래보다 소중한 ‘지금’을 놓치지 않을 딱 그만큼의 지혜를 터득해서 참 좋다.

돌아보니 지금까지의 삶은 참 운이 좋았다. 꿈꾸는 게 있으면 목표를 정해 항상 최선을 다했고, 어느 정도 원하는 결과를 늘 얻었다. 자. 이제 그려갈 그림은 생각대로 안 될 수도 있겠지만, 이 여유의 시간이 끝나면 또다시 쓰나미처럼 현실의 과제들이 밀려오겠지만, 이 마음을 잊지 말자. 큰 그림을 그리는 것. 그 안에서 목표가 생긴다면 주저 않고 도전하되 조급해하지 않는 것. 더 많은 책임감이 삶을 짓누르기 전에 미친 행동들을 더 많이 해보는 것. 실패하더라도 가진 것 하나만으로 변명이 되고 그 누구도 욕하지 않는 것. 지금의 내가 드디어 누릴 수 있게 된 것. 청춘의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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