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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Oct 02. 2017

‘쉼’이 주는 또 다른 불안

혹은 청춘예찬

졸업 신청 시기를 놓치고 반강제로 등록한 초과 학기와 함께 본격 ‘잉여’ 생활이 시작되었다. 만나자는 연락이 오면 ‘나는 아무 때나 가능하니 편한 시간에 보자’라고 답할 수 있을 정도다. 아르바이트와 스페인어 공부를 꾸준히 하고는 있지만 그 이외의 시간은 대부분 자유롭다. 몇몇 휴직하신 분들은 처음엔 좋다가도 뒤쳐지는 느낌에 불안해진다는데 솔직히 나는 뒤쳐짐에서 오는 불안은 없다. 10대 후반과 20대 초중반을 누구보다 악착같이 살았다고 생각하기에 반년쯤 쉬는 거로 내 인생은 끄덕 없다고 본다. 물론 대학교 동기들이 대부분 직장을 얻거나 석사학위를 딸 시기가 되었다만, 친구들의 합격 소식에는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다. 그건 어렵지 않다. 나는 내 나름의 길을 준비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거니와, 비교하며 조급해봐야 일만 그르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회적으로 1-2년 도태되는 건 별로 불안하지 않지만, 쉬는 마음이 마냥 편하지는 않다. 쉬는 기간이 끝나면 꽃이 지듯이 청춘도 질 것 같은 이상한 예감 때문이다. 내 머릿속에 청춘은 뭣도 모르기에 세상에 겁 없이 덤빌 수 있는 자신감을 지닌 존재이다. 자기 한계가 어딘지 모르기에 끝장을 봐야만 직성이 풀리고, 넘치는 에너지로 쉼 없이 달릴 수 있는 존재이다. 나의 20대도 그랬다. 늘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꾸고 도전해왔다. 현실에 맞추어 나를 바꾸기보다는 나의 꿈에 맞게 현실을 변화시켰다. 그런데, 스물여섯이라는 이 중요한 시기에 무언가를 하지 않고 그저 쉬기만 한다면 그 ‘도전 정신’도 같이 끝나는 건 아닐까? 벌써 쉬는 시간을 갖기엔 이 젊음이 너무 아깝지 않나? 쉼의 끝에는 도전보다 안정을 중시하는 시기가 찾아오지 않을까? 이렇게 철들고 어른이 되는 건가? 

     


정말 그럴까? 내 인생에서 장기간의 휴식은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군대였다. 가뜩이나 굼뜨고 느린 나로서는 참 적응하기 힘든 단체였지만 시간이 지나니 넘쳐나는 시간을 컨트롤하지 못했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휴가 나갔을 때 토플책을 사들고 일본어 자격증 공부도 했지만 아무래도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작정하고 놀아보자 싶었다. 그때부터 안 하던 운동을 시작했고,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다. 거의 매일 일기를 쓰며 생각의 내공을 넓혔다. 2년 동안 공부를 못해서 머리가 비워졌을지는 몰라도 앞으로 내가 살아갈 20대를 꿈꾸며 늘 설렐 수 있었다. 자유가 억압된 환경, 끼를 발산하지 못하고 응축해야 하는 시기는 괴로웠지만, 여유를 두고 이다음 스텝을 준비할 수 있었다. 전역하자마자 버킷리스트들을 하나 둘 실행했다. 무전여행, 토플 공부, 학점, 아르바이트, 필리핀과 인도 선교 여행, 미국 교환학생 등. 전역 후 딱 1년을 다시 쉼 없이 달렸다.

  

두 번째 휴식은 교환학생 때였다. 나에게 교환학생은 '영화' 같았다. 새벽 1시, 공부를 마치고 나오면 해리포터에 나오는 성 같은 도서관 건물 뒤로 야자수가 쫙 펼쳐져있고 짙은 하늘에는 별이 떠 있었다. 살사댄스 수업 시간에는 아름다운 여자들과 손을 잡고 파트너가 되어 정열의 춤을 추었다. 스펙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아무나 붙잡고 길을 물어봐도, 혹은 버스에 앉아 생전 처음 보는 옆자리 미국인과 시답잖은 대화를 하더라도 그것이 곧 스펙이 됐다. 나와 다르게 생긴 이들이 한 공간에서 수업을 듣고, 그들의 의견을 듣기도 하고 때로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각국의 학생들이 모인 테이블에서 한국이 통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그것도 영어로 설명하게 될 줄도 몰랐다. 캠프파이어 속에 녹아 내 입으로 들어가는 꿀 맛 같은 마시멜로도, 매일 아침을 일어나고 싶게 만드는 베이글과 크림치즈의 환상 조합도, 모든 것이 영화였다.


4개월을 미국에 있는 동안 일을 할 필요도, 사서 걱정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학점은 C만 넘기면 되는 PASS제도여서 공부도 대충 했다. 생전 안 하던 웨이트를 시작했고 수영도 배웠다. 그래도 시간이 남았다. 기숙사 침대에 가만히 누워 미드를 다운받아 보기도 하고, 한국에서 막혀있던 유튜브의 한국 드라마를 정주행 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비싼 돈 주고 와서 이렇게 편해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나중에는 다시 오지 못할 여유라 생각하고 누렸다. 이런 환경에서 나온 결과물이 ‘남미 여행’이었다. 원래 남미 여행을 계획하고 돈을 모아놓긴 했지만, 진짜로 갈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그저 여건이 되면 가겠거니 했는데, 넘치는 여유 속에서 생각해 보니 못 갈 이유도 없었다. 바로 비행기 표를 예매했고, 예산을 맞추기 위해 마지막 한 달은 국제 거지로 살아야 했지만 어쨌든 남미에 갔다.     

남미 여행까지 모두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나는 분명 달라져 있었다. 목적도 모른 채 무언가를 무작정 빠르게 파고들기보다는 방향 설정하는 법을 터득했다. 이 경험이 남은 3학기도 최선을 다해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왔다.  

교환학생 시절,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다시 나에게 주어진 쉬는 시간. 뒤처지는 것이 두렵지는 않지만 청춘을 잃게 될까 두렵다고 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짧게나마 내 삶을 돌아보니, 그런 걱정은 필요 없겠다. 내 삶에서 응축의 시기는 꽤 중요한 의미를 차지했음을 알았다. 장기간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힘을 조금 뺄 필요가 있겠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에 반발심이 든다면, 스스로를 좀 쉬게 내비둘 필요도 있겠다. 청춘이 질까 봐 두려워 걱정할 필요도 없겠다. 지는 것이 두려워서 아예 필 생각 조차 안 하는 꽃이 어디 있는가.


적성고사를 준비하는 학원의 고3 학생들의 시험 전 날.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해줬다.

“저는 실전에 강한 타입인데요. 여러 번의 시험을 겪어 보니까, 시험 칠 때 힘이 들어가면 오히려 평소보다 결과가 안 좋더라구요. 준비할 때는 ‘죽어도 OO대학교 간다’ 이런 절박한 마음으로 공부하셔야 하지만, 실전에서는 ‘OO대 아니어도 난 다른 데 갈 수 있어’라는 편한 마음으로 보세요. 자기 실력에 확신이 있어야 힘을 뺄 수 있어요. 힘을 뺄 줄 아는 거, 그게 진짜 자신감이에요.”

사실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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