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기 때문에 못 누리는 것
기껏 신나게 청춘예찬을 하다가 갑자기 브레이크가 걸렸다. 아직 젊기 때문에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것을 찾았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을 읽는 일이다.
심야로 영화 <남한산성>을 보고 왔다. 군대 있을 때 김훈의 원작 소설 <남한산성>을 읽었는데 그때는 소설이라면 무릇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토리라인이 있어야 재미를 느낄 수 있다고 믿었다. 김훈 작가님의 소설은 대부분 내 취향이 아니었다. <남한산성>역시 명확한 기승전결보다는 장면 하나하나를 길게 묘사하여 지루한 느낌이 났다. 22살의 나는 소설을 볼 때 디테일보다 스토리에 집중했던 것이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다. 재작년에 수업 과제로 처음 읽었던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는 주인공 한스의 모습이 마치 내 인생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읽는 내내 소름이 돋았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페스트>는 또 어떻고. 읽을 때 인물들의 대사 하나하나에 감명이 깊어지는가 하면 몇 번이고 곱씹어 보기도 했다. 이번에 영화 <남한산성>을 보면서도 두 충신 최명길(이병헌)과 김상헌(김윤석)의 설전을 보니 잘 완성된 한편의 문학작품을 읽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 후로 원작이 다시 궁금해져서 소설 <남한산성>을 빌렸다.
나이가 들수록 경험과 지혜가 많아져 문학을 보는 시야도 넓어진다던데 참말이다. 어느 국문과 교수님은 문학 작품에 대한 보고서를 받을 때 나이별로 차등을 두는 것이 공평하다고 말할 정도이니 말이다.
그런데 1달 전에 빌렸지만 15일의 기간이 지나고 1주일 연장 끝에도 다 읽지 못해서 연체 10일이 넘어가는 소설이 있다. 바로 그 유명한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1권이다.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를 감명 깊게 읽고서 언젠간 꼭 읽어야지 하다가 드디어 마음먹고 빌렸는데, 이거 영 진도가 나가질 않는다.
<안나 카레니나>는 분명 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명작이다.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의 감정선이 상당히 디테일하여 보는 내내 긴장감을 놓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싶은데, 나는 아직 <안나 카레니나>를 읽을 내공은 아닌가 보다. 주된 스토리라인이 상류사회, 불륜, 사랑 이런 거 같은데 상류사회에 속해본 적도 없거니와 26년 살면서 사랑의 경험도 별로 얻지 못했다. 불륜은 더더군다나 미지의 영역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총 3권까지 이어진다.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1권도 못다 읽었지만 내일 책을 반납할 예정이다. 사람마다 자기 때에 맞는 문학 작품이 있는데, 지금의 나에게 안나 카레니나는 조금 벅차다. 억지로 읽어봐야 ‘명작’에 괜한 흠집만 내게 될까 봐 두렵다. 이 책은 조금 더 삶의 내공이 쌓인 후에 다시 꺼내 보아야지.
젊음의 특권과 프리미엄을 누리는 것도 좋지만 문학작품이나 영화, 드라마를 더 잘 이해하고 싶어서라도 얼른 지혜와 내공을 쌓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