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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Oct 24. 2017

공대생의 문학(問學) 시간

들어가는 글

돌아보면 대학생활 내내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를 하느라 혼이 났습니다. 그저 수학 점수가 잘 나오기에 이과를 갔고, 전망이 좋고 취업도 잘 되니 굶어 죽을 걱정은 없다기에 공학을 선택했거든요. 2010년 12월, 제 수능 성적과 커다란 배치표를 비교해가며 제가 가야 할 대학과 학과를 찾았습니다. 이 점수로 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대학, 사람도 적당히 많이 뽑아 경쟁이 치열하지 않을 것 같은 학과, 전기전자공학과였습니다.


10대의 전부를 입시에 쏟아붓고 나니 스무 살이 넘어서야 사춘기가 찾아왔습니다. 대학만을 바라보다 주변의 사람들, 추억들을 놓친 학창 시절이 아까웠고 조금 억울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때쯤이었을까요. 제 전공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게요. 어느 정도 몸에 배어있던 성실함을 무기로 공부하니, 대학에서도 꽤 괜찮은 학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쩐지,

재미가 없었습니다.

공학에서 좋은 성적을 받으려면 세상의 모든 원리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돌아간다는 전제를 깔아야만 했으니까요. 이미 밝혀진 수학 법칙, 혹은 아인슈타인같이 넘사벽의 천재들이 쌓아놓은 양자역학이니 뭐니 하는 과학적 지식들. 저는 감히 이런 것들에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질 만큼 인물은 아니었어요. 이해하고 암기 하기도 벅찼거든요.

<누나. 슈뢰딩거의 개 알아?> <설마.. 슈뢰딩거의 고양이 말하는 거 아니지?>

그런데 이와 달리 삶은 부조리 투성이었어요. 모든 것이 계획대로 돌아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법칙이 따로 있지 않았던 거예요.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고등학교 수학 ‘확률’ 중에 이런 문제 기억나세요? ‘원희가 어느 장소에 우산을 놓고 올 확률은 1/3이다. 오늘 비가 내려서 우산을 들고 학교, 학원, 독서실, 편의점 총 4 장소에 들렀는데 ~’ 그런데 저처럼 우산을 자주 잃어버리는 사람들은 아시죠. 어딘가에 우산을 두고 온 것을 깨달을 때 얼마나 가슴 졸이는지. 내 손에 있어야 할 우산이 없어 허전함을 눈치챘을 때의 자괴감은 고작 확률 따위로 표현할 수 없는걸요.


머리가 조금 크고 나서는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세상의 약자들에 편에 서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그런 간지 나는 사람 말이에요. 동시에 이런 의문이 들었죠. 내가 배우는 공학(工學)이 공공의 선을 추구하는 공학(共學) 일 수는 없을까. 배우는 기술들이 그저 내 배 불리는데만 그치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쓰일 수는 없을까.


그러나 학교에서 배우는 공학은 가진 자들을 위한 학문이었습니다. 한 전공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요즘 미세먼지가 극성이죠. 그런데 그거 아세요? 미세먼지는 1990년대에 더 심했어요. 다만 지금처럼 언론에서 강하게 보도하지 않았을 뿐이죠. 언론에서는 또 청년 실업이 최고조라고 말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 여기 통계를 보시면 알 수 있듯이, 세계적인 불황 속에서도 우리나라 기업인 OO전자나 XX회사의 반도체 기술 수준과 매출은 세계 1, 2위를 다투고 있어요. 취업난? 그거 다 언론에서 부풀리는 거예요. 여러분의 미래는 생각보다 밝아요.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요.”


이 말을 듣는데 반발심이 들었습니다. 대기업의 매출이 순위권에 오른 것과 우리 미래가 밝은 것의 상관관계를 모르겠더라고요. 이렇게 공학이 대기업의 배만 불리는 학문이라면, 그런 종류의 자부심은 느끼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작년 이맘때 즈음은 저에게도 참 자괴감 들고 괴로운 시기였습니다. 광장에 가면 모두가 촛불을 들고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는데, 전공 수업에서는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거든요. 국정농단 사건이 한참 터질 때, 정치학개론 수업을 듣던 친구 말에 의하면 매시간마다 새로운 스캔들이 터져서 한 학기 내내 열띤 토론과 알찬 수업이 진행되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과 수업에서는 어느 교수님도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요. 우리나라 전기와 반도체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잘 발전하고 있으니까요. 굳이 수업시간에 국정농단이니 뭐니 말해서 흐름을 깰 필요가 없는 거죠. 내가 배우고 있는 공학은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걸까? 이런 의구심만 늘었습니다.


얼마나 재미없습니까. (물론 재밌게 공부하는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저는 정말 특이한 케이스 일지도 모르죠.) 제가 공학의 대체재로 찾은 것이 바로 문학이었습니다. 학교에서도, 그 어느 누구도 정의로운 세상에 대해, 내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알려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저에게 문학은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問學’입니다. 소설을 읽으면 늘 나의 존재에 대해 스스로 묻고 답하는 과정이 따라왔습니다. 한창 고민 중인 화두가 있으면 등장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읽다가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이고 비슷한 생각을 했던 이를 발견하곤 합니다. 그럴 땐 속이 뻥 뚫리는 사이다를 마시는 느낌입니다. 내 감정을 글로 표현하면 바로 이렇게 되겠구나, 이 답답함을 해소해 주어서 어찌나 고마운지!


또한 문학은 공학과 달리 제 고민들에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답을 제시해 주지 않았습니다. 제시하려 들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맞겠네요. 때로는 나의 아픔에 그저 공감 해 주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때로는 나보다 더 아픈 사람들의 처지에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 해 주기도 했습니다.


“당신의 생각은 틀렸어”라며 반박할 여지는 또 얼마나 많던가요. 그 어느 작가가 “내 소설은 이러한 의도로 쓰였으니 저렇게 보지 마시고 이렇게만 해석하시오! 태클은 받지 않겠소!” 이런 마음으로 글을 쓰겠습니까. 그런 글은 애초에 문학의 기능을 상실한다고 생각합니다. 해석의 다양성을 열어두며 저자와의 열띤 토론이 가능한 것. 문학이 가진 놓칠 수 없는 매력이었습니다. 저 같은 풋내기도 얼마든지 제 마음대로 해석 가능한 게 문학이니까요.


이렇게 쓰고 보니 무슨 공학은 완전 저급 학문이고 문학은 고급인 것처럼 말한 게 되었네요. 하지만 저는 고등학교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이과를 선택할 것이고, 전공을 다시 고른다 해도 전기전자 공학을 선택할 것 같아요. 지금은 공학으로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조금씩이라도 찾아보고 있습니다. 아마 문학을 전공했다면 문학 해석하는 법을 공부하느라 진절머리가 났을 거예요. 게다가 취업이 더 어렵다고 하니, 지금처럼 보험 하나 들어놓은 셈 치고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할 수 있는 배짱을 부리기도 어려웠을 겁니다. 문학을 소재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문학을 그 자체로 즐기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닐까요?


평생 문학을 깊게 공부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학작품을 더 이상 보지 않게 될 일도 없을 겁니다. 제가 살아있는 한 세상을 향해, 자신을 향해 계속 질문을 던질 테고, 묻고 답하는 수단으로 문학을 적극 활용할 생각입니다. 이 매거진은 문학작품 요약본을 올리려는 의도로 시작한 게 아닙니다. 그저 제 생각에 공감해주고 이를 다듬어 주었던 보석 같은 작품들을 많은 분들에게 소개하고, 아직은 짧은 저의 인생 이야기도 풀어볼까 해서 시작합니다. 살아온 날이 짧기에 문학 작품을 그 안에 담는 과정이 많이 미숙하겠지만 여러모로 도움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어떤 비평도, 응원도, 격려도 적극적으로 환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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