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대가리 Oct 26. 2017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까?

수레바퀴 아래서. 1

대학생인 제 꿈 중 하나는 복수전공이었어요. 공대생에게도 인문학적 감성이 필요하다고 확신했습니다. 그 마음으로 독일문학개론 수업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왜 독문학이냐구요? 단순했어요.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한 문장에 꽂혔거든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대화에서 신이 “인간이란 노력하는 동안에는 방황하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22살이 저 말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긴 했을까요? 그냥 좋았습니다. 누구나 그런 경험 있잖아요. 한 문장이 좋아서 『파우스트』를 좋아했고, 파우스트가 좋아서 괴테를 좋아하게 됐고, 괴테가 좋아서 독문학을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그 수업의 두 번째 과제로 읽었던 책이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였습니다. 바로 오늘 소개 해 드릴 책이지요. 그렇게 저의 인생 캐릭터, 한스 기벤라트를 만났습니다.


한스는 어린 시절부터 동네 어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자라납니다. 작은 마을에서 주(州) 시험에 합격할 만한 유일한 후보자였던거죠. 시험에 합격해서 신학교에 들어가기만 하면 엘리트의 삶은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국가의 보조금을 받으며 신학교, 수도원, 목사, 대학 교수의 코스를 밟을 수 있습니다. 모든 어른들은 한스가 이 평탄하고 안전한 길을 가기 원했습니다. 공부하는 게 아무리 괴로워도 주 시험에 합격하기만 하면 남은 인생이 행복할거라며 무언의 폭력을 가한 것이죠. 당장 한스의 행복보다 성공을 바랐을겁니다. 또한 아이의 성공 자체보다 그로인해 자신들이 갖게 될 명예와 뿌듯함이 먼저였습니다. 저 아이의 인생에 내가 큰 관여를 했다는, 뭐 그런거요. 한스에게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알려 준 마을 목사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기벤라트가 시험장에 들어갈 시간이오. 두고 보구려, 언젠가 그 아이는 훌륭한 인물이 될 테니까. 틀림없이 모두들 그 아이를 눈여겨보게 될 거요. 그렇게 되면 내가 그 아이에게 라틴어를 가르친게 헛된 노력은 아닌 게지요」


한스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험 전날, 한스에게 용기를 복돋워 주겠다는 명목으로 쉴 새 없이 ‘썰’을 풀어놓지만 이런 아버지의 배려는 오히려 어린 소년을 완전히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게 됩니다. 결국 시험이 끝난 후, 한스와의 대화에서 본심이 드러납니다.


식탁에서 한스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죄를 지은 사람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마구 퍼부어지는 질문공세에 대해 그저 어깨를 으쓱할 따름이었다. 숙모가 그를 위로해 주기는 했지만, 격양된 아버지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옆방으로 데리고 가서는 다시 한 번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잘 보지 못했어요」 한스가 말했다.
「왜 신중하질 못했니? 정신을 바짝 차릴 수도 있었을 텐데. 이런, 제기랄!」
한스는 잠자코 있었다. 아버지가 욕설을 퍼부어대자, 그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버진 그리스어를 전혀 모르시잖아요!」


수레바퀴 아래서를 처음 읽었을 때 충격을 받았던 이유는 한스를 움직이는 동기가 저와 놀랍도록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왜 공부해야 하는지 모른 채, 어른들로부터 ‘성공’에 대한 가치관을 강요받은 것입니다.


자기의 자그마한 방, 여기서 그는 피곤과 졸음, 두통과 싸우며 시저와 크세노폰, 문법과 사전, 그리고 수학 숙제와 씨름하며 기나긴 저녁 나절을 보냈다. 그래도 이 방에서 그는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즐거움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시간들을 보냈었다. 그것은 자부심과 도취, 승리감에 가득 찬, 꿈과도 같은 기이한 시간들이었다. 그때에 그는 학교나 시험,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을 뛰어 넘어 보다 높은 존재의 영역을 꿈꾸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뺨이 두툼하고 평범한 학교 친구들과는 다르다는, 더 나은 존재라는 예감이 한스를 사로잡았었다. 언젠가는 속세에서 벗어난 높은 곳에서 우쭐대며 이들을 내려다보게 되리라는, 건방지면서도 행복에 겨운 예감이었다.


저 역시 어린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몸에 밴 학습 동기가 있었습니다. 좋은 대학교에 가야 돈을 많이 벌고, 그래야 번듯한 인생,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게다가 우리집은 학원 하나 다니기도 쉽지 않을 만큼 가난하니, 이 집안을 내가 살려야 한다, 부모님께 실망을 끼쳐드릴 수 없다, 이런 마음으로 악착같이 공부 했습니다.


당연히 제 학창시절은 늘 불행했습니다. 10대때는 친구들과의 관계에 상당히 민감하잖아요? 제가 그때 쓴 싸이 다이어리를 읽어보면 하루하루 우울증에 시달리는 관종을 발견합니다. 어제까지 잘 놀던 친구는 왜 갑자기 나를 멀리하는지 모르겠고, 그럼 저는 또 그 관계에 집착하고, 또래들이 하는 게임도 잘 못하니 같이 PC방에 가지도 못하고, 얼굴이 잘생긴 것도 아니고, 운동신경이 꽝이어서 체육 시간에 같이 어울리지도 못하고,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고백 한 번 못 해보고 도망가고. 한마디로 참 찌질했지요.


그런 제가 학우들의 인정을 받고 스스로 어깨를 당당하게 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공부였습니다. 쉬는시간마다 삼삼오오 어울리는 친구들을 보며 조금 억울했지만, 저는 더 악착같이 공부 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학에 합격한다면 이 모든 시절을 보상받을 수 있을거라고 확신했거든요. 어느 정도였냐면, 우리 고3때 남아공 월드컵이 한창이었어요. 그런데 대한민국vs아르헨티나 경기 시간이 딱 야자 시간이랑 겹치는거예요. 평소에는 고3들을 쥐잡듯이 가두어 놓았는데 웬일인지 이날만큼은 전교생에게 TV를 틀고 경기를 관람 하도록 허락 해 주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공부를 하고 싶은 학생들은 도서관으로 가라길래 저는 갔죠. 단 하루도 놓칠 수 없었어요. 추억같은건 제 앞날에 별 도움이 안 될 거라고 믿었거든요.


그래서인지 고등학교 졸업식은 조금 쓸쓸했습니다. 결과로 치면 저는 입시에서 성공한 편이었는데요. 졸업식날 저녁은 보통 성년이 된 기념으로 삼삼오오 모여서 술집으로 가곤 하잖아요? 슬프게도, 저는 낄 곳이 없더군요. 오라고 하는 곳도 없었고 딱히 끼고 싶은 무리도 없었습니다. 웃으며 친구들과 헤어졌지만, 이를 악 다문 채 집으로 돌아왔지요.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나의 20대는 10대와 다르리라. 불행했던 시절을 모조리 보상받고,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하고싶은 것 다 하면서 살리라.”


돌아보면, 제가 입시 지옥에서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똑똑해서가 아니라 사춘기가 늦게 왔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만 사람구실 할 수 있다는 어른들의 말에 의심을 품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던거죠. 그들이 만들어놓은 탄탄한 세상에 조금 안전하게 편입하고 싶었을 거예요. 그러니, 한스를 처음 만났을 때 얼마나 충격이었겠습니까. 억울했던 나의 10대를 소설이 보상해 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동병상련의 위로는 주더군요.



그 시절 저의 불행을 어른들의 탓으로 돌려버리면 되었습니다. 그게 제가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한스의 아버지에게, 마을 목사에게, 교장에게 마냥 분노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개성이 아닌 획일성을 강요하는 세상이 싫었으니까요. 이번에 글을 쓰기 위해 소설을 다시 읽었습니다. 신기하게도 한스가 아닌 주변 어른들에게 유독 눈길이 갔는데요. 그들의 태도에 여전히 분노는 일지만, 그들의 입장도 이해가 되는겁니다. 어른들에게는 일종의 책임과 역할이 부여되기 마련인데 그들은 한스를 위해 각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한 게 아닐까. 실은 조금 찔리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지금 고1학생 한 명에게 수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명으로 상우라고 합시다. 상우는 공부에 큰 흥미가 없어요. 천성이 여리고 순해서 인생에 큰 욕심이 없거든요. 그저 마음 맞는 친구들하고 잘 지내면서 학교 다니면 그게 행복이지요. 그런데 상우 어머니는 조금 다릅니다. 상우가 장남이어서 이 아이에게 거는 기대가 크더군요. 애초에 공부를 열심히 할 마음이 없는 애를 데려다가 수학 학원, 영어 학원, 국어 학원, 과학 학원에 보내고 그거도 모자라 과외까지 시킨겁니다. 상우에게 물어보니 “학원이라도 다니니까 그나마 중위권 성적 나오는 거예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아이의 과외 선생님입니다. 저에게 월급을 주시는 상우의 어머니가 제게 바라는 건 무엇일까요? 아이의 인생과 꿈에 공감하며 함께 진로를 탐색하는 걸까요, 아니면 당장 기말고사의 수학 점수를 올려주는 걸까요?     

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 역시 이 나라 입시 제도가 낳은 피해자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 피해를 다른 아이에게 고스란히 되물림 해 주고 있었던 겁니다.



“상우야, 너의 가장 큰 문제는 스스로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한거다. 성적에 대한 욕심이 없으니 무얼 해도 대충 하지. 그리고 다니는 게 너무 많아. 나 같아도 버티지 못했을 거야. 자. 그런데 내 수업은 숙제가 무지하게 많어. 너는 이걸 다 해야해. 그래야 기말고사 성적을 조금이라도 올릴 수 있다. 방법은 두 가지야. 욕심을 버리고 목표를 낮추거나, 잠을 줄여. 뭘 선택할래?”


이렇게 말하고 있는 스스로가 양심에 찔렸습니다. 나름 타협점으로 삼은 게 3시간 수업 중 앞에 20분정도는 매번 진로 상담을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상우는 꿈이 없어서 아직 어떤 과를 가야 할지 못 정했다고 합니다. 일주일에 한 학과씩 정해 무엇을 배우는지 알아보고 저에게 5분 브리핑을 하도록 시켰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찜찜합니다. 제 학창시절 아픔들은 고스란히 숨긴 채, 악착같이 공부에 덤비기를 종용하고, 그것이 성공인 냥 포장해야 하는 제 스스로가 부끄러웠습니다. 학생 입장에서 공감해주기보다 우선 성적을 올려줘야 하는 게 참 딜레마였습니다.


자, 이제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나의 불행했던 10대를 어른들 핑계 대가며 더 이상 불평할 수 없습니다. 저도 이미 어른이니까요. 10대를 희생한 대가로 어느정도 행복한 20대를 누리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니까요. 그렇다면 저는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까요? 나도 그런 지옥을 뚫고 살아남았으니 너희들도 똑같은 세상에서 살아봐야 한다. 세상이 바뀌길 기대하지 말고, 스스로가 변해야 한다. 동료를 밟고 앞으로 전진하는 법을 배워라. 이렇게 가르쳐야 하나요? 그래서 한스와 같이 여린 소년들의 꿈을 무참히 짓밟으면서도 그게 현실이라며, 나는 최선을 다한거라며 합리화해야 하는건가요?


아니면, 나의 청소년기가 불행했으니 다음 세대는 학생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라며 그런 세상을 만드는 데 삶을 쏟아보자, 이런 이상주의를 가져야 하나요? 저 한 사람이 이런 꿈을 가진들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는 할까요?     


사실, 패기로 신청한 독문과 수업은 문과생들에게 발릴것이 두려워 중간고사도 채 보기 전에 철회 해야 했습니다. 공대 전공도 감당하기 벅찬 저에게 독문과 수업은 일종의 ‘이상’이었던거죠. 아무튼, 시도는 해 봤네요. 시도는 하고 나서 아, 이건 불가능한거구나, 깨달았어요. 그럼에도 여전히 현실에서 이상을 품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제 나름의 답을 찾는데 도움이 된 책을 한 권 더 소개할게요.


이상주의자를 믿었지만, 곧 이상주의자 역시 종종 권력의 유혹에 굴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권력을 쥐고 나서 그 자신이 목숨을 걸고 반대하던 ‘악’이 되어버리거나, 현실의 매서운 주먹에 엉망진창으로 두들겨맞고 링 밖으로 쫓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상을 실현할 기회는 영원히 사라진다. 이상주의자가 품위를 가질 때 권력에 의해 타락하지 않을 수 있고, 능력을 가질 때 이상을 실천에 옮길 힘이 생긴다. 그러나 품위와 능력을 겸비한 이상주의자란, 극히 드물다.
룽잉타이 『눈으로 하는 작별』


그렇습니다. 이상주의자로 살아가려면 품위와 능력을 겸비해야 하는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그럼에도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 어른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면, 룽잉타이가 말하듯 이상주의자가 있는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직은 아무런 품위도, 능력도 없는 젊은이일지라도 내가 겪은 불행을 다음 세대에게 되물려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반은 성공했다고 봅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가여운 소년 한스는 시험에 합격합니다. 본격적인 신학교 생활이 시작되면서 예상지 못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시 쓰는 소년 하일너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고 닮고 싶은 친구죠.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이 친구와의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서술해야 할 것 같군요.



참고도서 :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 민음사

괴테 『파우스트』, 문학동네

룽잉타이 『눈으로 하는 작별』,양철북

매거진의 이전글 공대생의 문학(問學)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