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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Oct 31. 2017

인생의 수레바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까?

수레바퀴 아래서 2.

실은 어제 학원을 때려쳤습니다.



권고 퇴직이었던 걸까요? 비록 작은 학원이고 제가 맡은 반 학생들도 10명 내외였지만 학생들이 좋아서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가르쳤습니다. 저는 겨우 문자 한 통을 보내 일방적으로 수업을 취소하는 학원 측이 아니꼬왔습니다. 얼마 전부터 학생 수가 많이 줄어서 2개로 운영하던 반을 합쳤고, 그로 인해 다른 선생님이 해고 통보를 받은 걸 기억하고 있었는데 비슷한 일을 당하니 화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끝까지 아이들을 탓하고, 자기들 잘못은 부정하려는 학원의 태도에도 화가 났지만 답장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아이들에게 「내일 수업 없대요. 학원 오지 마세요^^」라는 문자를 보낸 게 고작이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발악이었죠.


당연히 해야 할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밤에 잠이 안 오더군요. 학원의 입장이 이해는 되었습니다. 돈이 되어야 학원이 굴러갈 텐데, 당장 학생이 안 오면 임금을 지불하는 게 곧 학원의 손해였으니까요. 위선이든 뭐든, 어쩔 수 없이 굴러가는 시스템이 그랬으니까요. 작은 학원이고, 고작 아르바이트지만 제가 사회생활 잘 못하는 낙오자가 되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는 모범생입니다. 지난 시간에 봤듯이 어른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따라서 엘리트 코스를 밟는, 총망받는 학생이었죠. 이 어른들, 참 고약합니다. 시험이 끝난 뒤에도 한스를 놔주지 않았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면 경쟁자들이 더 수두룩 할 거라며, 미리부터 그리스어니, 히브리어니, 여러 준비를 해 두어야 한다며 공부를 강요합니다. 합격 후, 여유로운 시간에도 불구하고 한스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틈 없이 공부만 하게 됩니다.


그런데, 신학교에 입학한 한스의 곁에 헤르만 하일너가 등장합니다. 학창 시절에 꼭 그런 애들 한 명씩 있잖아요. 공상가에 음유시인 느낌 나고, 공부는 막 못하지는 않지만 모범생들 꾀어서 놀러 다니는 거 좋아하고. 하일너가 그랬습니다. 한스가 철이 너무 일찍 들어서 자신에 대한 성찰이 부족했다면, 하일너는 철이 덜 들었기 때문에 자신과 세상에 대해 성찰하기를 즐겼습니다. 이런 하일너는 한스의 새로운 삶을 열어주는 자극제가 됩니다. 자연을 돌아다니며 시 쓰고, 공상하고, 이런 캐릭터를 처음 만난 겁니다.


하일너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 지금과는 전혀 딴판이었지. 여기에 있는 놈들이 그런 일들을 알기나 하겠어? 모두 다 따분한 위선자들뿐이라구! 그저 진땀이나 뻘뻘 흘리며 공부에만 매달리는 가엾은 존재들이지. 히브리어의 철자보다 더 고상한 걸 전혀 모르고 있어. 너도 마찬가지라구.」
「이건 날품팔이에 지나지 않아. 넌 네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잖니. 그저 선생님과 부모님이 두려운 거겠지. 아니, 1등을 하든, 2등을 하든, 그게 도대체 너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니?. 그래, 난 겨우 20등이야. 그렇다고 너희 공부벌레들보다 어리석진 않다구.」


한스에게 거침없이 팩폭을 가하죠. 하일너는 기성세대와 전통에 저항적이었습니다. 어느 날 교장 선생의 권위에도 도전하는데, 이 사건으로 하일너에게는 무거운 금고형이 내려집니다. 하일너와 우정을 쌓고 있던 한스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금고형이 내려진 친구와 가까이 지내는 순간, 자신도 처벌을 면치 못하니까요.


한스 기벤라트도 하일너의 편을 드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느끼면서도 차마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한스는 자신의 비겁한 행동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그와 어울리는 일이 위험할 뿐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자기도 나쁜 평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 또한 분명했다. 자라나는 젊은이들에게 베풀어지는 국가의 자선에 걸맞게 학생들의 규율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엄격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친구로서의 의무감과 학생으로서의 공명심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다. 그러다가 끝내 지치고 말았다. 그가 지닌 미래의 이상은 남보다 앞서 나아가는 것, 시험에서 훌륭한 성적을 올리는 것, 그리고 나름대로의 주어진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이었다.


사이가 틀어지는 듯했으나, 한스의 사과로 둘의 관계는 더 깊게 발전합니다. 하일너와의 우정이 커질수록 학교는 한스에게 점점 더 낯설게 여겨졌습니다. 오히려 하일너와 보내는 은밀한 시간이 그에게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나무랄 데 없던 모범생이었던 한스의 변한 모습을 보고 선생들도 모두 경악하죠. 모두 하일너의 몹쓸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 선생은 자기가 맡은 반에 한 명의 천재보다는 차라리 여러 명의 멍청이들이 들어오기를 바라게 마련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선생에게 주어진 과제는 무절제한 인간이 아닌, 라틴어나 산수에 뛰어나고, 성실하며 정직한 인간을 키워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 더 상대방 때문에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게 되는가! 선생이 학생 때문인가, 아니면 그 반대로 학생이 선생 때문인가! 그리고 누가 더 상대방을 억누르고, 괴롭히는가! 또한 누가 상대방의 인생과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더럽히는가!


한스의 성적은 나날이 떨어지고, 그를 걱정한 교장과의 면담이 이루어집니다.


「자네와 잠깐 얘기 좀 하고 싶은데, 반말 해도 괜찮겠지?」
「그럼요, 교장 선생님」
「기벤라트! 자네 스스로도 느끼고 있겠지만, 요즘 들어 자네 성적이 조금 떨어졌다네. 적어도 히브리어에선 말이야. 아마 지금까진 자네가 우리 학교에서 히브리어에 가장 뛰어난 학생이었을 거야. 나로선 무척이나 유감이라네.」
...
「그렇다면 난 정말이지 짐작할 수 없네. 어딘가에 문제가 있긴 있을 텐데 말야. 자네 앞으로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나한테 약속해 주겠나?」
한스는 권력자가 내민 오른손에 자신의 손을 얹어놓았다. 교장 선생은 그를 엄숙하면서도 부드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럼, 그래야지. 아무튼 지치지 않도록 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교장이 말한 수레바퀴는 무엇이었을까요? 모든 인생을 짓누르는 삶의 무게감? 끊임없이 굴려야만 살아남는 잔인한 현실? 요즘 말로 하자면 이유 없는 노오력? 개성 넘치는 젊은이들을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단단한 울타리로, 그런 사회로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정말 그 젊은이들을 위한 것일까요?



결국 하일너는 지긋지긋한 수도원을 탈주합니다. 몇 마일 떨어진 숲 속에 누워 자유를 만끽하며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었죠. 특유의 익살로 마을 읍장의 마음을 사, 그곳에서 하룻밤 머물기도 합니다. 그의 일탈은 어떻게 끝날까요?

  

탈주자 하일너가 붙잡혀 왔을 때, 수도원에서는 엄청난 흥분이 일었다. 그는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고 다녔다. 짧았던 천재다운 여행을 뉘우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빌라는 요구를 거절했다. 교수회의의 비밀 재판에서는 전혀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매우 불손하게 행동했다. 그는 명예스럽지 못한 퇴교 처분을 받고, 저녁에 아버지와 함께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머나먼 길을 떠났다.


하일너가 떠난 뒤, 한스의 학교 생활은 파탄에 이릅니다. 더 이상 예전에 모범생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수업시간에 멍 때리다 선생님의 지적을 받아도 듣지 못할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교장 선생은 그를 마치 바리새인이 세리 대하듯 경멸에 가득 찬 태도로 대합니다. 한스는 학생들의 무리에도 끼어들지 못했습니다. 문둔병자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죠.


학교와 아버지, 그리고 몇몇 선생들의 야비스러운 명예심이 연약한 어린 생명을 이처럼 무참히 짓밟고 말았다는 사실을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왜 그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소년 시절에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를 해야만 했는가? 왜 그에게서 토끼를 빼앗아버리고, 라틴어 학교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료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는가? 왜 낚시하러 가거나 시내를 거닐어보는 것조차 금지했는가? 왜 심신을 피곤하게 만들 뿐인 하찮은 명예심을 부추겨 그에게 저속하고 공허한 이상을 심어주었는가? 왜 시험이 끝난 뒤에도 응당 쉬어야 할 휴식조차 허락하지 않았는가? 이제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길가에 쓰러진 이 망아지는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저도 그동안 수레바퀴에 깔리지 않기 위해 참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대입을 위해 추억을 희생했습니다. 대학에 와서도 성실함을 무기라 생각하며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아르바이트, 학점, 동아리, 어학 그 어느 것도 빠지지 않기 위해 늘 피곤함을 달고 살았습니다. 한스 기벤라트처럼 너무 일찍 철이 들었는지도 모르죠.


하일너라는 인물을 처음 만났을 때, 솔직히 부러웠습니다. 세상이 굴러가는 시스템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거죠. 어른들에게, 전통에게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낼 줄 아는 당돌하고 자신감에 찬 모습도 탐났습니다. 어느 순간 하일너는 제 롤모델이 되었습니다.


오늘 조금 다른 심경으로 이 책을 다시 읽었습니다. 생각해보니 하일너는 신학교에서 퇴학 당하고 끝나더군요. 그 뒤의 행보가 어찌 되었는지는 아무도 알 길이 없지요. 헤르만 헤세의 또다른 소설 「크눌프」의 주인공처럼 음유시인이 되어 세상을 떠돌다가 죽음을 당했을 수도 있구요. 어느 순간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안정된 직장을 잡아 본인의 과거를 억누르며 살아갔을 수도 있겠네요. 수레바퀴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이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정말 미지의 영역입니다.


어딜 가나 인생의 수레바퀴로부터 자유로운 영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자유로운 영혼들을 향해 부러움을 느끼는 동시에 비판을 하곤 합니다. 저들은 인생의 무게와 책임감을 모른다며, 혼자 살아가는 것 마냥 철이 덜 들었다고 쉽게 판단하는 것이죠. 저만해도 그래요. 헤르만 헤세와 그의 작품을 좋아하지만, 그의 인생은 좋아하지 않거든요. 결혼 후에도 아내와 자식을 놔두고 그저 여행 다니고, 글 쓰고, 하고 싶은 대로 살았던 그의 행보 말입니다. 그러면서 젊은 날의 사랑이니 뭐니, 너무 낭만스럽게 포장하고 있는 건 아닌지 늘 불만이었습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인생의 수레바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자유로워진 들, 그 삶은 행복할까요? 제가 학원에 마지막 발악을 한 것도 어쩌면 하일너처럼 되고 싶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한스 기벤라트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네요. 당장 쉽게 돈벌이가 잘되던 학원을 때려치고 나니, 여행 경비를 어떻게 마련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거든요. 여전히 앞날에 불안해하고, 현재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아무것도 안 하며 흘려보낸 하루하루를 자책하며 살고 있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인생의 수레바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나 봅니다. 그래도, 자유로워지려는 시도를 멈추지는 않으려 합니다. 영원히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면, 적어도 수레바퀴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갈 생각입니다. 사회에서 강요하는 방향 말구요. 조금 더 쉽고 편한 내리막길이 아닐지라도, 온 힘을 다해 바퀴를 굴려야 하는 오르막길을 가더라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소신 있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한스의 비극적 결말이 저에게 안긴 인상은 한 가지, 바로 획일화된 삶을 강요하는 사회가 개인에게 얼마나 악영향을 끼치는가입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비극적인 결말이 충격적이기는 합니다만, 독자에게는 사이다가 되어 돌아옵니다. 결말은 비밀로 부칠게요. 여러분을 짓누르는 인생의 무게가 무거울 때, 이 사이다같은 소설 꼭 한번 읽어보세요.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에 깔리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참고도서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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