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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Mar 07. 2018

보통의 나라

Prologue

키토 공항. 알싸한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시내 가는 택시비는 25불인데 흥정하다 보니 20불까지 깎았다. 그동안 배운 에스빠냐어나 연습해 볼까 해서 기사님께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 에콰도르에 일 하러 왔는데요. 좀 떨리네요. 스페인어도 잘 못하는데.”

“잘하는데요? 어디서 왔어요?”

“꼬레아.”

“꼬레아 델 수르? 오 노르떼?”

“오오, 아저씨. 꼬레아 델 노르떼 사람들은 여기 못 와요. 여행 자유 없어요.”

“그래요? 요즘 뉴스에 꼬레아 많이 나오던데. 올림픽! 근데 꼬레아는 왜 분단이 된 거예요?”

“그게.. 미국이랑 소련이 각각 남북을..”

“아. 그렇게 된 거구나! 항상 궁금했는데. 그럼 통일하겠네요? “

“쉽지 않아요. 미국이랑 중국, 많은 나라들이 관계가 있어요. 어.. 음..”

그래 이 정도면 됐다. 택시 아저씨에게 한반도 자주 통일을 이야기할 수 있다니, 공부한 게 아깝지는 않구나. 아저씨는 세계 여러 나라의 지폐를 모은다고 했다. 마침 1,000원짜리가 몇 장 있어서 하나 드렸다. 에콰도르에서 처음으로 길게 이야기해 본 사람이라 그런지 정이 갔다. 흥정해서 탄 택시지만 25불을 다 드렸다. 이렇게 하면 윈윈이지 않을까? 아저씨도 5불을 보너스로 받은 기분이고, 나도 재밌는 대화에 감사의 표시를 할 수 있고. 아. 애초에 흥정을 한 게 잘못인 건가.


저번 여행에도 느꼈지만 맑은 날 키토 하늘은 정말 파랗다. 복잡한 도로를 뚫고 경적이 끊임없이 울린다. 빨간불에 사람이 건넌다. 차는 잠시 멈춘다. 사람이 다 건너가자 차들이 다시 달린다. 초록불이 됐다. 차들이 계속 달린다. 응?


코에 은은하게 베어 오는 이 냄새는 매연이 섞어 상쾌하지는 않지만 2년 전 그대로다. 시각, 청각, 그 어느 감각보다 후각이 먼저 반응했다. 마치 보고 싶었던 고등학교 친구를 졸업하고 처음 만난 기분이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드디어, 다시 남미에 왔구나. 꿈처럼 다시 나는 이곳에 왔구나.


며칠 전, 호주인 룸메이트와 영화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그 애가 물었다.

“어쩌다 남미에 왔어?”

“2년 전에 남미 배낭여행을 했었어. 그 뒤로 남미에 푹 빠졌지. 어떻게 다시 남미에 갈까 내내 고민하다가 인턴십 프로그램을 알게 돼서 지원했는데 운 좋게 붙어서 왔어.”

“왜 수많은 나라 중에 에콰도르야?”

“글쎄. 지역기구들 중에 내 전공으로 지원할 수 있는 곳이 여기밖에 없었거든. 너는? 에콰도르에는 처음이야?”

“아니. 한 3년 전엔가, 처음 왔었어. 그 뒤로 몇 번 더 와서 이번이 네 번째야.”

“네 번이나? 너야말로 왜 다시 에콰도르에 온 거야?”

“지역학을 공부하는데 내가 제일 사랑하는 곳에서 연구를 하고 싶었거든. 난 에콰도르가 좋아. 여기, 키토가 좋아. 고산지대인 것도 마음에 들고 1년 내내 선선한 날씨도 좋고, 사람들도 유쾌하고 친절해. 네 방에서 보이는 키토 시내 전경 장난 아니잖아? 그 뷰가 내 방에서도 보이거든. 또 우리 집 뒤에 공원 있지? 거기 가봤어?”

“응. 아직 시차적응이 덜 됐는지 새벽 5시에 눈이 떠지더라. 오늘 아침에 조깅하고 왔어.”

“보면 알겠지만 사실 그냥 평범한 공원이거든. 뭐 특별히 예쁜 건 없는데 그냥, 대도시 안에 커다란 숲에 있는 공원. 나는 그 공원이 무척이나 좋아.”

“그래서 네 번이나 왔구나.”

“응. 근데 내 친구들은 에콰도르를 잘 모르더라. 주변에 있는 콜롬비아, 페루,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은 다 아는데 여기는 잘 몰라.”

“내 친구들도 마찬가지야. 여기 오기 전에 맨날 나한테 물어봤어. ‘너 가는 데가 어디라고? 파라과이? 우루과이? 과테말라?.. 야, 네 글자면 다 똑같지 뭐.’ 왜 에콰도르는 안 유명한 걸까? 나름 다양한 투어 코스가 있는데.”

“다 있긴 한데, 다른 남미 나라들이 더 뛰어나서 그래. 에콰도르에도 유적지는 있지만 남미 유적지 하면 페루 마추픽추가 제일 유명하지. 여기도 산유국이지만 베네수엘라에 못 미치고. 아마존도 있지만, 다른 나라들보다 규모도 작아. 사람들은 갈라파고스는 잘 아는데 갈라파고스가 에콰도르 영토인지는 모르더라. 사실 그래서 이 나라에 더 정감이 가. 평범해서. 사람들이 에콰도르의 매력을 잘 알게 됐으면 좋겠어.”

이 뷰에 속아 그만.. 직장에서 한시간 반 거리에 집을 계약 해 버렸다.

나 역시 에콰도르는 남미 여행 중 고작 1주일, 스쳐 가는 나라에 불과했었다. 물론 그때 만난 사람들이 모두 좋았지만, 그들의 친절함은 콜롬비아인의 친절함에는 못 미쳤다. 키토 구시가지의 성당은 멕시코시티의 메트로폴리탄에 못 미쳤다. 바뇨스의 액티비티도 재밌었지만, 페루에서 했던 정글 트레일이 더 기억에 남는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유산으로 지정된 쿠엔카는 분명 멋진 도시였지만, 멕시코의 산크리스토발에 비해 감흥은 덜했다.


자, 이제 이곳에서 6개월간 생활한다. 우선은 이곳에 인턴으로 왔다. 당분간은 유목이 아닌 정착민 모드로 지내야 한다. 그러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 이곳의 매력에 흠뻑 빠져야 하고, 여기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 말이 좀 안 통해도 먼저 웃으면서 다가가야 한다. 그래서일까. 룸메이트의 말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다. ‘남미’를 사랑하기 이전에 ‘에콰도르’ 그리고 키토를 사랑해야지.


이제부터 에콰도르 적응기를 적어볼까 한다. 여기 온 지 1주일이 안 됐는데 아직 음식에 적응을 못해서 밥 양이 반으로 줄었다. 그렇게 사랑한 남미였지만, 새로운 문화에 녹아드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같은 이방인이어도 여행자의 시선과 근로자(?)의 시선은 분명 다르니 말이다.


‘남미 적응 고군분투기’라고 하기엔 좀 거창하고, ‘에콰도르 일상 여행기?’ 이건 좀 오그라들고. 모르겠다. 그냥 나는 지난 2년간 늘 남미를 꿈꿔왔고, 지금 남미에 있으니까. 꿈같은 일들도, 꿈을 깨게 만드는 일들도 남김없이 털어놓고 싶다. 정말, 꿈처럼 다시 여기에 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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