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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Mar 08. 2018

익숙함을 이기는 힘

청춘예찬 4탄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더니! 여행 중인 사람들이 부러워졌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막 들이대며 누구와도 쉽게 친해질 수 있으니 말이다. 매 순간이 그렇지는 않지만 대게 여행 중에 오는 ‘낯섦’은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채워지곤 한다. 하지만 정착민일 경우 이야기가 달라진다. 직장과 집에서 매일 똑같은 사람들을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봐야 한다. 나의 밑바닥이 안 드러날 수가 없다. 결국 같은 해외라 해도 정착민에게 ‘낯섦’은 곧 외로움, 자신과의 혹독한 싸움으로 이어진다. 나도 예외일 리 없다. 에콰도르에 온 지 1주일.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다.



직장에서는 언어가 가장 큰 문제다. 라틴 문화에 맞춰서 늘 업 된 상태로 사람들과 지내고 싶지만 내 소심함은 외국에 왔다 해서 어디 가지 않았다. 이름도 다 외우고 먼저 웃으며 생글생글 살갑게 인사를 해야 할 텐데, 뭐랄까. 한마디 걸면 끝난다. 또 그 한마디를 하기까지 머릿속에서 얼마나 많은 과정을 거치는가! 문법이 이게 맞는지, 억양은 어떻게 해야 할지. 이것저것 신경 쓰다 보면 문법이고 억양이고 결국 한 껏 소심해진 목소리와 함께 끝을 흐리게 된다. 그럴수록 현지인들은 더 못 알아듣는다.


누군가 먼저 말을 걸거나 질문에 대한 답을 들으면 대충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감이 온다. 나머지 디테일은? 알아들은 척해야지 뭐. 결국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런 식.


“야! 내 친구가 지금 에너지 공사에서 일하거든? 근데 이번에 스캔들이 터져서 난리가 났어.”

“아. 에너지 공사?”

“응.”

“..”

“..”


결국 다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식. 아직까지 직장에서 하루 종일 쓰는 말 대부분이 Si(네), Gracias(고마워요) 밖에 없으니 말이다. 어휴. 이러려고 에콰도르까지 왔나 싶다. 편한 곳에서는 상황이 조금 달라진다. 망고 하나를 350원에 살 수 있는 집 앞 과일가게에 자주 들렀다. 여기 아저씨랑은 쉽게 말을 텄다. 먼저 웃으면서 살갑게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아오! 왜 근데 직장에서는 이게 안되냐고. 인턴이라 그런가? 회사에서 제일 낮은 위치에 있어서? 아무리 자유로운 분위기라지만 직급을 무시할 순 없나? 의무교육 12년 플러스 선택교육 4년을 사고 한 번 안치고 성실하게 이행한 죄밖에 없는데!


이곳의 점심시간은 30분이다. 대신 퇴근이 네 시 반. 꼭 30분을 지킬 필요는 없지만 밖에 나가서 밥을 사 먹기엔 빠듯한 시간이다. 첫 이틀은 도시락 싸올 시간이 나지 않아서 외부 식당에 갔다. 첫날은 중국음식점 치파에서 볶음밥을 시켰다. 직원은 중국 교포인 것 같다. 내가 들어올 때는 거들떠도 안 보길래 카운터에 가서 메뉴를 골랐는데, 현지인 손님이 들어오니까 직접 가서 메뉴판을 전달해 준다. 화났지만 볶음밥이 입맛에 맞으니 참았다. 둘째 날은 이태리 피자집에 가서 3불짜리 멕시코 브리또를 시켰다. 피자집에서는 피자 먹는 게 맞다. 미국 월마트에서 팔던 1불짜리 브리또가 더 맛있었다.


오늘은 드디어 집에서 샐러드를 챙겨 왔다. 늦잠을 잔 터라 야채를 삶지 못하고 양배추(양상추인 줄 알고 샀는데 양배추였다. 오 마이 갓. 어쩐지 샌드위치에 식감이 안 좋더라니.), 브로콜리, 토마토, 생양파와 함께 슬라이스 치킨, 치즈, 시저 소스를 챙겨갔다. 드디어 나도 회사 1층에 만남의 장소를 이용해봤다. 밥 먹고 있던 친절한 직원 한분이 ‘Buen Provecho' 하셨다. 뭔 소리인지 모르지만 일단 그라시아스. 알고 보니 맛있게 드세요 라는 뜻이었다.


저 안쪽에 직원 3명이 밥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저기 껴야 할까, 혼자 먹어야 할까. 아. 너무 재밌어 보인다. 말을 너무 빨리해서 무슨 대화인지는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그니까 혼자 앉아 먹어야지. 저들의 즐거운 한 때를 내가 방해할 수는 없지. 암. 아. 오늘따라 양배추 왜 이렇게 질기니. 브로콜리는 생으로 먹을 게 못 되는구나. 지금 내 눈에 눈물이 나는 건 내 처지가 구질구질해서가 아니야. 양파가 맵기 때문이야. 그래도 생양파를 씹는다. 하나. 둘. ㅅ..ㅔㅅ.. 시저 소스랑 먹으면 아삭아삭한 식감이 나쁘지 않다. 괜히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게 부끄러워서 딱딱한 야채를 우걱우걱 씹어 넘겼다. 브런치, 인스타, 카카오톡을 1분에 한 번씩 번갈아가면서 열어본다는 건 내가 많이 외롭다는 증거다.


업무 도중에는 내 사무실 근처로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만 들려도 긴장한다. 그들이 날 감독할까 봐? 아니다. 여기 근무 환경이 그렇게 빡빡하지 않다. 다만 어떻게 인사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어서 그렇다. 남녀 사이에는 가볍게 포옹하며 양 볼에 뽀뽀 (소리만)를 하던데, 초면이니까 악수를 하면 되겠지? 오후 12시면 부에노스 디아스인지, 부에나스 따르데스인지 헷갈리는데. 아까 인사 한 사람이면 그냥 올라, 하면 되나? 상사한테는 꼬모에스따가 맞을까 꼬모에스따스가 맞을까? 아. 머리 터진다. 그냥 반갑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안녕하세요 하고 싶다.


경비 아저씨는 나한테 되게 친절하시던데. 대부분 직원들은 진짜 반갑게 웃으면서 말 걸어주던데. 왜 몇몇 사람들은 나를 볼 때 표정이 밝지가 않지? 내 옆에 다비드랑은 엄청 웃고 떠들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는 인간관계로 고민해 본 적이 거의 없다. 10대 시절에 워낙 사람들로부터 많이 상처받고 관계에 대한 고민을 오랫동안 해서 그런가.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걸 일찍 깨달았다. 허나 ‘낯섦’을 장착하니 그 모든 깨달음이 허투루 돌아간다. 좀! 모두가 이 외국인에게 친절했으면 좋겠고, 모두가 나를 반겨줬으면 좋겠다고요. 이거 완전 어린이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좋은 경험이지만 나의 자존감이 낮아지는 단계까지 가면 위험한데 말이다.



이번엔 집에 대해 얘기해보겠다. 두 개의 집을 돌아다니며 비교했다. 첫 번째 집은 중심가와 가깝고 가격도 싼 데다가 직장까지 교통편도 편리하다. 두 번째 집은 통근을 위해 30분의 버스와 30분의 걷기를 요하고, 좀 더 비싸지만 바로 뒤에 큰 숲이 있어서 조용하다. 게다가, 침대에서 키토 시내의 전경을 시원하게 볼 수 있다. 결정적으로 첫 번째 집은 오피스텔 느낌이라면 두 번째는 장기 투숙자들을 위한 호스텔이다.

타지 생활이 외로워질까 봐 (사실은 뷰에 혹해서) 두 번째 집을 택했다. 아.. 매일 아침 5시 50분에 일어나야 한다. 분명 네시 반 퇴근인데, 집에 오면 여섯 시가 넘는다.


그런데 처음 며칠은 오히려 더 외로웠다. 여기 사는 5명 중 나만 아시아, 4명은 백인이다. 유럽, 호주, 미국. 낯설었다. 요리 하나 해 먹는 것도 조심스럽고, 이들 대화에 끼는 게 참 어려웠다. 아.. 한인 민박집 사장님이 싸게 해 준다고 했는데. 그냥 거기 들어갈 걸 그랬나 싶다. 익숙함과 새로움 사이의 갈등이 생기는 순간이다.


해발 2700m에 살면 조금만 빨리 걸어도 숨이 가빠오고, 물이 끓기까지 참 오래 걸리지만. 구름이랑 친구 먹는 기분이어서 뭐. 나쁘진 않다.

익숙함을 선택하는 순간, 생활이 훨씬 편해지긴 하겠지만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묘미는 적어질 것이다. 새로움을 선택한다면? 처음엔 조금 외로울 수 있어도 나에 대해, 사람에 대해, 세상에 대해 더 많이 배우게 될 거다. 글감도 더 많아질 거야. 나의 선택은? 주저 없이 후자다.


이곳에 머무는 초기 한두 달은 내 자아가 어디까지 뚫고 내려갈 수 있는지 체험해 보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부끄럽지 않음은 내가 여전히 젊은 까닭이다. (오랜만에 청춘예찬?) 문화를 좀 모르면 어떤가. 기존 나의 모습을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내면서 새롭게 배운 문화로 채워 나가면 되는 거지.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내일부터는 출근하거든 상사에게 하루에 10번 이상 질문을 할 거다. 귀찮을 정도로! 같은 사무실 쓰는 다비드하고는 일상적인 소재로 5분씩, 3번 이상 대화를 시도해야지. 어저께 한국에서 사 온 상감마마 마그네틱 줬으니까 마음이 좀 더 열렸겠지?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남 눈치 보던 습관 다 던져버리고 새로운 내 모습으로 채워보자. 익숙함을 이겨내는 힘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지만 행복한 젊음에서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호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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