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
최진숙(2017)은 ’우리가 남이가’는 레지스터화와 성격화를 통하여 경상도 방언을 권력, 마피아 등의 이미지와 연결하는 방식에서 활용되고 있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 ‘우리가 남이가’가 포괄한다고 간주되는 성격이 경상도 사람들의 일반적 성격인 것처럼 그 의미가 재생산된다. 다양한 매체에서 그 의미가 재생산 되는데, 푸틴의 기사에 ‘우리가 남이가’를 붙이는 식이다. 기호와 지표된 대상 간의 연관성이 고유한 속성인 양 고착화된 것이다.
경상도 사람들의 성격이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로 재현되고 있다면, 영호남 나아가 한국 사람들을 포괄하는 성격으로 자주 제시되는 것은 바로 ‘한국사람은 빨리빨리’일 것이다. 최진숙(2017)의 연구에서처럼 조사를 하지는 못했지만, ’빨리빨리’라는 단어가 그 자체가 주는 신속함을 넘어 효율성의 추구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가 최근에는 속도만 중시하는 경제성장의 부작용 혹은 압축적 근대화의 부작용 등의 맥락에서 사용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한국 사람들은 원래 빨리 빨리 해야해’처럼 마치 태초부터 그러한 속성인 양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한복을 입고 ‘에헴~’하며 생활하는 선비의 모습을 떠올려보아도 빨리빨리가 한국인의 원래 성격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원인이라고 한다면 한국전쟁 이후 최빈국 중 하나였던 한국이 짧은 시간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해,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생긴 습관일것이다. ‘빨리 빨리 해야한다’라는 담론이 사람들의 성격으로서 굳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 말에 3년만에 완성한 경부고속도로가 세계 최단기 완성이었다거나 1970년대 중동에 진출한 한국 건설 업체들이 경쟁사들과 달리 24시간 공사를 진행한 것이 한국인의 성격을 묘사하는 예시로서 사용되는 식이다. (빨리빨리’는 한국인 성격 그 자체 http://www.asiac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043 2017.09.18 아시아싸이뉴스) 그러나 삼풍백화점 붕괴가 빨리빨리의 비극으로 상상되듯이 부정적인 측면으로서 고려되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또한 한국사람들이 스스로를 ‘빨리빨리’의 성격으로 묘사할때 역시 기호화 지표된 대상 간의 연관성이 고유한 속성인 양 고착화된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는 대체로 게으른 누군가에 반해 빨리빨리의 한국인들은 신속하고 효율적이고 부지런하다는 등 긍정적인 것으로 묘사한다. 주로 날씨가 따뜻하고 사람들이 여유롭게 생활하는 동남아시아에 나가있는 한국인들이 ‘게으른’ 동남아인들에 비해 ‘우리’ 한국인들은 ‘빨리빨리’해야 직성이 풀리지 않느냐며 말하는 경우를 왕왕 목격하였다. 혹은 어느국가 어느 공항인지 알려져있지 않지만 인터넷에 유명한 일화로, 비행기가 연착되어 연유를 알지 못하고 사람들이 공항에서 발이 묶여 있는 상황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공항직원들이 비행기에 실었던 짐을 모두 내리는 장면을 참문 너머로 목격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공항에 있던 한국인 중 한명이 “어어 야 짐 뺀다!”라고 외쳤고 그 말을 들은 사람들 중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국인들만이 비행기가 뜨지 못함을 눈치채고 일사천리로 짐을 챙겨 떠났다고 한다. 보통 이 일화와 함께 인터넷에서 “역시 한국인들은 빨리빨리죠..”라는 말이 사용되는데 이때도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긍정적인 감정, 자부심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빨리빨리가 한국 내부에서 사용되는 맥락과 한국 외부에서 사용되는 맥락이 상이한 것이다. ‘우리가 남이가’가 경상도 내부에서는 유대감과 정, 친밀감 등의 긍정적인 어감으로 사용되었다면 경상도 외부에서 타자화 과정을 통해 권력자의 부패, 마피아 라는 이미지와 결합하여 부정적인 맥락에서 사용되는 것과 반대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서울 사람들이 경상도를 타자화시켰기 때문이라면, 이 경우는 한국인이 한국어 사용자들사이에서 외국인이나 다른 누군가를 타자화 시킬때에 긍정적인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
성격이라는 측면에서, ‘대체로 무해함’ 이라는 단어는 겉으로 보기에는 특정성별을 지칭하는 것 같지 않으나 최근 인터넷을 중심으로한 미디어에서는 대체로 남성을 지칭하는 어구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무해함이라는 속성은 지금까지 ‘귀여운’이라는 형용사와 함께 주로 여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어 왔다. 어리고 미성숙한 ‘귀여운 여성’은 남성의 권위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그 무해함으로 인해 사랑받아 왔다. 특히나 애교를 부리며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는 성인, 그중에서도 젊은 여성들은 그 무해함을 통해 연애상대로서의 매력을 인정받아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여성들도 ‘무해한’ 남성을 긍정적인 연애상대 남성의 속성으로 여기면서 분위기가 전환되었다. 바야흐로 귀엽고 ‘무해한’ 남성의 시대가 된 것이다. 폭력적이거나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기존의 남성성에 반해 자상하고 조용하고 조심스로운 ‘무해한’ 남성성이 여성들의 주목을 받았다. 잠재적으로 나를 죽이지 않고 때리지 않는 상대를 찾게 된 것이다. 대체로 박보검이나 안재현, 드라마 ‘밥 잘사주는 예쁜 누나’의 정해인 등으로 이해된다. 무해함이라는 특성이 성격으로서 이야기되고 그것이 대안적이고 긍정적인 남성성으로 해석되면서 기존의 남성성을 타자화한다. 이제 무해한 남성들은 무해한 성격을 가진 것을 넘어 여성을 존중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의사소통을 아는 남성들로 호명된다. ‘대체로 무해한’ 남성들을 선호하는 여성들의 등장은 이제 여성들이 오빠에게 귀여운 애인으로 남아있기를 거부하고 연애시장의 주체로 자리하겠다는 선언에 다름없다.
<참고문헌>
최진숙, 2017, “ ‘우리가 남이가’: 상호텍스트적 구성을 통한 경상도의 타자화”, 『한국문화인류학』 50(3): 87-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