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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ernalYoung Dec 05. 2018

반말이 결정하는 것들

다른 종류의 반말들

이현정(2018)은 돌봄노동을 제공하는 사람이 여성 노인 환자에게서 반말을 사용하는 상황이 '노인'이나 '환자'일뿐만 아니라 '여성'  노인환자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젠더화된 현상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화자들도 모두 여성이었음에도 이러한 현상이 관찰된다는 것이다. 논문에서는 신체와 정신이 건강한 노인은 일반적으로 한국사회에서 존댓말의 대상이 된다는 것, 혹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정상적 기능을 하지 못하는 노인환자라도 가정 내에서 가부장적 권위를 가진 아버지나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을 보유한 재벌 그룹의 총수 같은 '남성' 노인환자에게는 반말이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언급하였다. 


청자가 여성이기 때문에 반말이 사용되는 비슷한 사례로서, 화자보다 어린 여성을 청자로 '오빠가~'라는 주어를 사용하는 현상을 볼 수가 있다. 물론 이것은 모든 한국 남성이 사용하는 어투라고는 볼 수 없지만 이런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생길만큼 아주 드물지도 않은 현상이라고 하겠다. 


'오빠가~'라는 주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어린 여성 청자의 관계에서는 일방적인 반말이 발생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혹은 두사람이 반말을 하는 관계라고 하더라도 오빠라는 호칭(지칭)어를 통해 젠더/나이 권력에서 미묘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상황이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오빠가~'를 사용하는 사람은 쉽게 "오빠가 주는 거니까 먹어/마셔", "오빠가 해줄게/도와줄게/알려줄게" 등의 발언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빠라는 단어가 위계적 관계 에서의 언어사용으로 쉽게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빠라는 단어가 청자에게 명령/요구/가르침의 주체로 기능하는 자격을 부여한다. 


그리고 이런 '오빠가~'로 스스로를 지칭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남성간의 서열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확실한 형님-아우 관계 설정 이후에 대화의 진행이 가능한 것이다. 형님은 형님 대접을 받아야 하고 아우는 아우 노릇을 하며 형님을 모셔야한다. 위계가 성립된 이후에 상호호혜적인 관계가 설정되고 그곳에서 발생하는 품앗이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집단 속에서 개인의 주체성을 중요시하는 한국인에게 있어 자신의 역할이 정해져야 역할에 주어진 자율성을 실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한국에서 가장 화제가 된 인종간 커플(Interracial couple). 이 방송 이후 야기된 "엄마인가, 베이비시터인가"하는 논쟁은 백인 남성-아시안 여성의 사회적 시선


나는 태국 방콕에서 태국어 수업을 들을 당시, 같은 수업을 듣는 동등한 학생들(Classmate)로서 55세 미국인 남성과 독특한 대화를 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영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반말이라고 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지만 '존댓말이 부재'한 상황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같은 어린 여성 청자가 존댓말에서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논문에서 사용된 반말의 종류를 참고하자면, 친구나 동료 사이에 사용하는 반말과 유사한 대화상황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첫번째 55세 남성은 은퇴이후 이혼하고 방콕에 정착하였으며 약 30대 중후반의 태국 여성과 교제 중이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상황을 밝힌 이후 그는 태국이 아닌 아시아계 여성으로서 유럽과 미국 같은 제 1세계의 백인 남성이 (남성보다 가난하다고 생각되는) 태국여성과 연애 및 결혼을 하게 되는 상황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의견을 물어보았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했을때 그가 가정한 나의 특성으로는 태국이 아닌 아시아 출신의, 연애 시장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졌다고 상상되는 20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그는 특히 "늙은(은퇴한)-(뚱뚱하고 대머리의) 못생긴- 백인 남성"들이 "젊고(남성과 10~20살 가량 차이나는)-아름다운-(그러나 가난한)" 태국인 여성들의 교제를 비판적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몸 관리를 열심히하며 못생기지 않은) 자신과 여자친구는 인종과 국적, 계급을 초월한 사랑이었다. 그 이유로 영어가 유창한 여자친구와 자신의 활발한 의사소통을 이야기했다. 굳이 나의 시선과 의견을 물어보는 이 상황이 굉장히 이질적이고 색다르게 느껴졌다. 우선, (본인의) 연애 및 결혼은 한국에서는 20대와 50대가 함께 이야기하는 주제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친족관계가 아닌, 50대 남성과 20대 여성이 하는 대화주제로는 흔하지 않은 거 같다. 또한 그가 태국 여성들이 동년배의 태국 남성들을 선택하지 않고 연상의 백인 남성과 결혼하게 되는 이유를 본인이 생각하는 한에서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노력하는 모습이 이 대화를 더욱 신기하게 만들었다. 마치 나에게 허락과 이해를 구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같은 조건의 한국인들 혹은 한국어 화자들 사이에서도 이같은 대화가 발생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똑같이 은퇴-이혼-태국이주 후 태국 여성과 교제하는 어머니 지인 한국 남성을 만났던 적이 있는데 그는 "이 사람이 아저씨 여자친구야"라는 통보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의견을 궁금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본인과 여자친구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굉장히 어색하고 부끄러워했다. 그의 민망해하는 태도가 본인과 여자친구의 관계를 인식하는 태도라고 생각했다. 한쪽은 반말을 하고 한쪽은 존댓말을 하는 상황에서는 의견을 물을 필요도 없고 동시에 그 '민망함'이라는 감정이 해소될 통로도 없다. 마치 이현정(2018)이 지적한 것처럼, 더 나은 돌봄을 제공하고자 하는 좋은 의도에서 반말과 아기말이 발화된다고 하더라도, 여성 환자 노인의 주체적인 선택과는 무관 하게 돌봄제공자가 일방적으로 “위계적인 인간 계층 구조 안으로 납치”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인 남성은 친밀감의 표시로 반말을 사용했으나 청자가 타협적이고 수용적인 주체성을 받아들이게 만들었고, 역설적으로 본인의 민망함의 감정을 해소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참고문헌>

강윤희, 2007, “인도네시아 쁘딸랑안 여성들의 외설주문: 언어, 몸, 그리고 욕망”, 『비교문화연구』 13(1): 5-34.
이현정, 2018, “병원에서의 반말 사용과 여성 노인환자의 주체성: 돌봄의 젠더 정치”, 『비교문화연구』 24(2): 397-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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