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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여우 Mar 17. 2022

우리는 중요할까

사회복무요원 여우씨의 일일 - 6

테크노포비아는 아무 것도 해결해 주지 못하지만, 탈주술화의 강력한 비호 아래 놓인 기술과 20세기 이데올로기의 실패 사례들 속에 등장한 신자유주의의 금융자본주의가 다스리는 새로운 신정 정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휴머니즘은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나르시시즘에 빠져 그 자체를 포기했다. 낭만주의가 찾던 진정성은 사실상 '나'에 대한 이해의 강요의 측면이 더 컸으며, 보다 편리하고 합리적인 방식의 강요를 위해 휴머니즘은 다양한 방식으로 인류를 차이의 탈을 쓴 열등성으로 배제와 갈등의 역사를 써내려나가면서 혐오를 당연하게 공유되고, 공유되어야만 하는 보편적인 감정으로 자리매김시켰다.


사실 기술이 지배하는 시대에 인간이 스스로 사유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계와 함께 정형화된 노동이 증대되는 상황에서 최선의 효율을 내기 위해 사유는 반응성을 떨어뜨려 위계질서  경쟁자의 먹이가 되게 하는 무용한 사치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 헝거게임의 주인공이자 엑스트라이다. 결국 리얼리즘(생산성) 협박으로부터의 자율, , 자유는, 인간 이성이 추구하려고 했으나 철저하게 추구가 금지된 것이 되었다.


물론 기술의 발전과 함께 지적 자본의 유입과 유출이 압도적으로 쉬워짐에 따라 지식 풀(pool)이 넓어지고, 그만큼 접근성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우리는 새로운 대상에 쉽게 관심을 가질 수 있고, 그만큼 쉽게 다른 대상으로 넘어갈 수 있다. 경계선을 침범하고, 침범당하는 것이 많아지면서 경계선은 점점 복잡하게 꼬이거나 흩어지게 되며, 이러한 네트워크의 복잡성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성은 과잉 행동과 불감증을 동시에 앓게 된다. 그만큼 우리는 주제와 관계없이 모든 것에 경도되어 있고, 과거의 악명 높은 독재자들의 수사법을 알면서도(사실은 알고 있기 때문에) 반복하고 따르게 되며, 피상적인 이해에 편승하여 유행의 물살을 타고 서둘러 다른 사회적 갈등을 찾아 나선다. 논의의 매듭을 지으려는 일부는 '진지충'으로 호도되며, '얕고 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이미 알고 있는 말을 듣기 좋게 반복해주면서 새로운 내용을 한두 문장 정도 추가하는 지식인의 탈을 쓴 앵무새들이 (곧 관심을 잃겠지만) 박수를 받는다. 우리는 얕은 지식으로 이끌리는 역사에 놓여있다.


오늘날의 인간들이 "관심을 둔다"라는 말로 이해하고 있는 그런 방식으로 인간이 관심 있어 하지 않는 것이 오늘날 과연 있기나 한가? - 마르틴 하이데거, <사유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 글 어딘가

로지 브라이도티.<<포스트휴먼>>(2015)., 리처드 서넷.<<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2002)., 마르틴 하이데거.<<강연과 논문>>(2000).,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미래 가능성>>(2021)., 스티브 풀러.<<지식인>>(2007)., 김곡.<<과잉존재>>(2021). 션 캐럴.<<빅 픽쳐>>(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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