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무요원 여우씨의 일일 - 5
알려진 두 구조 사이의 동형관계의 인식은 지식의 의미심장한 진보이다. 그래서 나는 인간의 마음에서 의미를 창출하는 동형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동형관계가 다양한 모습과 크기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 동형관계를 찾았는지 늘 분명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파악하기 위해 의미 있는 해석을 선택하고 해독하기란 불가능한 일이고, 불가능에는 정도가 없으며, 그저 우리는 의미 없는 해석 중 최선의 해석을 선택하려고 노력할 뿐이고, 그게 안된다면 포기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고, 반대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대자로서 존재하고 대자로서 대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혐오스럽게 다가왔었는데, 누구든 대자이기 때문에 타격이 없는 선에서의 (끊기를 포함한) 관계가 가능하고, 여태 살아온 원천과 존재 이유를 알 수 없는 무용하디 무용한 도덕 규칙 중 몇 가지에 의해 피해의식에 쩌들어있고 비관론에 휩싸였다고 생각한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혐오감(그러니까 이건, 사람은 전부 죽어야하고 나 또한 그렇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지만 여기에서 자세하게 말하고 싶지 않다.)은 결코 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한 것이었고, 그 생각이 현실과 정확히 들어맞았으며, 배덕감이 불러일으킨 유희인지 의혹이 진실로 다가온 것에 대한 지적 진보감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며칠 동안의 우울감이 말끔하게는 아니더라도 제법 해소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완성된 크레이프 케이크의 정성을 한 겹 한 겹 벗기는 노력을 모든 케이크에 대해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고, 문제의 해결을 갈등과 투쟁의 위험이 내포된 곳에서 바라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에 대한 기만이자 능욕이라는 거다, 인간은 절대 죽여서는 안된다, 상대를 죽여서도, 자신을 죽여서도 안된다. 인간은, 적어도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자발적으로 죽을 자격이 결코 있을 수 없다, 출생이라는 원죄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지면서 그저 혐오스럽고 원망스럽게만 보이던 것들이 도리어 불쌍하고 애처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깊이는 활자에서 찾으면 된다, 완벽하게 수동적인 정돈된 텍스트들 속에서는 적어도 동형관계를 찾아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정도 능력이면 애잔한 인간에게는 매우 과분하다. 불행한 선민으로서 새 것이 되기를 되어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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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호프스태터.<<괴델, 에셔, 바흐>>(1979)., 장폴 사르트르.<<존재와 무>>(1943)., Bertolt Brecht.<Von der Kindermörderin Marie Farrar>(1922). 고린도후서 5장 17절.